이영준 / 기계비평가


  사이버공간, 지구상에서 가장 유목하기 쉬운 곳이다. 인터넷은 있지만 나라 밖의 소식은 볼 수 없는 북한 같은 나라는 빼고, 그리고 북한과 관련된 사이트는 볼 수 없게 막아 놓은 남한 같은 곳도 빼고, 또 구글에서 천안문광장을 검색하면 천안문사태에 대한 내용은 일체 없고 오로지 관광 정보만 출력되도록 조치해 놓은 중국 같은 곳도 빼면 사이버공간은 어디든 가서 무엇이든 볼 수 있는 무제한의 자유 공간이다. 그 덕에 우리는 견문이 넓어져서 아헬치헤, 츠힌발리, 압하지야 같은 괴상한 지명을 가진 장소들도 찾아가 볼 수 있다. 또한 남들이 성행위하는 극도로 은밀하고 사적인 장면도 들여다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이버공간에서 정말로 정처 없이 아무 곳이나 떠도는 것일까? 우리는 컴퓨터를 켜서 인터넷에 접속하면 다짜고짜 아무 사이트나 접속하지 않는다.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찾아서 다음이나 네이버, 구글 등 정보로 가는 통로로 먼저 들어간다. 그리고 그 사이트들이 안내해 주는 대로 정보를 찾아간다. 따라서 내가 사이버공간에서 궁극적으로 가는 곳은 내 컴퓨터의 즐겨찾기에 등록돼 있는 장소들(사이트들)이다. 아헬치헤로 가기 위해서는 구글로 가야 한다. 그곳에 있는 사람에게 이메일을 보내기 위해 나는 네이버로 간다. 내가 실제로 유목의 공간인 몽골이나 요르단의 사막으로 가려면 먼저 구글로 가서 정보를 찾아야 하고 익스피디어닷컴으로 가서 비행기표를 사야 한다. 즐겨찾기에 등록돼 있는 사이트들은 길거리의 이정표처럼, 길을 잃는 나에게 끊임없이 되돌아올 지점을 지정해 준다. 그 덕에 나는 아무리 집에서 멀리 나가 헤매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헤매고 헤매다가 엉뚱한 사이트에 갔어도 즐겨찾기에서 네이버만 클릭하면 나는 다시 안락한 세계로 돌아올 수 있다. 마치 ‘죽은 자의 귀환’처럼 나는 끊임없이 같은 장소로 되돌아온다. 나는 결코 유목의 길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가 정말로 유목적으로 사는 것이 가능할까?
 

   몽골인이나 베두인족 같은 진짜 유목민의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들에게는 우리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이 없다. 우선 집이 없다. 또한 전기와 수도, 그리고 주소가 없으니 우편배달이라는 것이 없다. 물건을 살 가게도 없고 피로를 풀 노래방이나 술집도 없다. 병원도 학교도 동사무소도 없다. 이런 물리적인 시설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시설과 연관된 삶의 패러다임도 없다. 길도 없고 도시 자체가 없다. 이를 사이버공간에 적용해 보자. 사실 전기가 없으면 사이버 유목이고 뭐고 처음부터 불가능하지만 이런 조건에서 시작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므로 일단 전기는 주기로 하자. 사이버공간에서 아이피나 이메일 주소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인터넷 접속과 이메일을 쓰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아이피가 없이 인터넷에 접속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지만 어찌해서 접속했다고 쳐도 내 이메일 주소나 계정이 없으면 나를 대표로 내세워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럴 때 정보를 주고받는 방법은 정말 유목민처럼 황야를 정처 없이 헤매다가(그들이 실제로 정처 없이 떠도는지, 아니면 나름대로 길과 구역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얻어 걸리는 정보를 아무렇게나 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어느 도시의 호텔을 예약하려는데 그것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 호텔인지 확인하지 않고 아무 호텔이나 예약하는 것처럼 막막한 일이다. 여행을 떠난 다음 어떤 호텔을 만나면 그곳이 내가 예약한 곳인지 물어본 뒤, 맞으면 투숙하고 아니면 또 다른 호텔을 찾는 식이다. 예를 들어 아헬치헤에 있는 호텔을 예약하고는 파리에 가서 아무 호텔이나 간 다음  내가 예약한 곳이 맞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메일도 나의 계정으로 특정한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병 속에 메시지를 넣어서 바다에 띄우면 먼 훗날 누군가 보는 식으로 아무에게나 보낸다. 그러면 나의 메시지와 통하는 어떤 사람이 그걸 보고 또 그만의 방식으로 답하면서 소통한다.
 

  과연 우리가 사이버공간에서 이런 식으로 살 수 있을까? 우리가 사이버공간에서 메시지를 주고받고 웹사이트를 검색하는 것은 모두 특정한 위치에서 특정한 위치의 사이트를 향해 벌어지는 일이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주름진 공간의 특정 마디와 다른 마디 사이에서 이뤄지는 소통이다. 그곳은 결코 평평한 공간이 아니다. 그 체계 안에서 자유롭게 떠돈다 해도  모든 정보의 움직임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관리되고 있다. 우리가 사이버공간에서 자유롭게 유목할 수 있는 만큼 우리를 감시하는 자들도 자유롭다.
 

  최근 정부가 인터넷상에서 아동음란물의 유포뿐만 아니라 단순소지도 처벌하겠다고 강경하게 나선 것은 그런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라서 차라리 고맙다. 즉 사이버공간에서 우리들은 관리되고 감시당하고 있으며,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잡아넣을 수 있음을 정직하게 보여준 것이다. 전에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북한의 노동신문 홈페이지에 접속하려 하자 사이버 경찰청의 명의로 “이 사이트에는 접속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아이피 주소는 000.00.0000.000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뜬 적이 있다. 즉 우리가 노려보고 있으니 국가보안법에 어긋나는 짓은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런 메시지가 나오지 않는다. 경찰이 자신을 드러내는 파놉티콘 이전 시대의 원시적인 감시로부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현대적인 감시로 바꾼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어떤 공간에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사이버공간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 경찰도 그렇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말을 타고 사이버의 평원을 신나게 가로지를 때 경찰도 말을 타고 나를 뒤쫓아 올 수 있다. 그것도 유목이라면 유목이라고 부르자. 하지만 유목이라는 말은 함부로 쓰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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