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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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문화
[시대를 感하다]공포를 파는 안전 상품-보험과 자본주의이택광 /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
박지혜 기자  |  utois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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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호]
승인 2012.10.25  20: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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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for the Head of a Screaming Pope>, Francis Bacon, 1952

  우리는 안전한 사회를 원한다. 요즘처럼 연일 ‘흉악범죄’가 언론을 장식하는 상황에서 안전한 사회에 대한 요구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범죄를 스펙터클로 만들어 제시하는 언론의 목적은 조회 수를 올리고 신문 판매 부수를 높여서 광고를 많이 유치하는 것이겠지만, 이것을 보고 듣는 대중은 언제든 자신에게 닥쳐올 위험을 경계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공포가 정치의 기본이라면 보험은 공포를 해소하기 위한 안전에 대한 요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보험은 태생적으로 자본주의와 친화력을 갖는다. 보험 자체가 바로 상품이기 때문이다. 무형의 안전 보장을 판매하는 것이 보험 상품이다. 보험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만큼 길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과 유사한 보험제도가 만들어진 시기는 14세기였다. 그 시기 북부 이탈리아의 제노아에서 보험을 투자가 아니라 보장으로 받아들이는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보험제도의 태동은 당시 사회경제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태동할 무렵부터 보험은 인간의 불안을 양식 삼아 생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포가 야기하는 불안이 크면 클수록 보험의 주가도 올라가는 셈이다. 물론 보험제도 자체는 공동체의 합의와 호혜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가 본격화되면서 특히 한국사회처럼 후발 자본주의의 압축 성장을 경험한 국가에서 보험의 취지는 ‘내 가족주의’라는 절대적인 정언명령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라는 것이 야만의 상태를 벗어나 서로 물고 뜯는 이전투구를 넘어서는 새로운 단계를 의미한다면, 보험도 이렇게 인간의 불안을 문명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제도일지 모른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국가가 필요했던 것처럼 그 국가를 신뢰하기 힘들었던 이들이 보험을 발명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시민사회가 만들어지더라도 개인이 세계나 타인과 맺는 관계는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는데, 이런 관계 맺기를 잘 만들어 내기 위해 상부상조가 필요하다고 봤다. 초기에 보험의 취지는 이와 같은 상부상조의 문제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보험제도에 숨어 있는 상부상조의 정신 같은 것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보험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개인의 공포와 불안을 다스리기 위한 대응책이라는 사실이다.
 

보험, 불안과 공포의 ‘물화’
 

  한국 사회에서 보험은 단순하게 개인과 가족, 또는 자산을 보장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문화적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즉 공공성에 대한 열망의 ‘물화’라고 볼 수 있다. 공공성의 극대화가 이루어진 곳이 바로 근대인들이 꿈꿔온 유토피아인 것이다. 물화라는 것은 상품 구조를 통해 발생하는 가치전도현상, 즉 객관적이지 않은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은 구체적인 현실성을 획득하고,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기원을 은폐하며 자율성을 획득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험은 불안과 공포의 물화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상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보험이라는 제도에 내재한 합리성이다. 보험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는 “재해나 각종 사고 따위가 일어날 경우의 경제적 손해에 대비해, 공통된 사고의 위협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미리 일정한 돈을 함께 적립해 뒀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일정 금액을 주어 손해를 보상하는 제도”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바로 “공통된 사고의 위협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서로 협력해서 사고를 당한 사람의 손해를 보상해 주는 것이다. 이 기능을 실제로 담당해야 하는 곳은 국가이다. 그러나 이 국가가 재정적으로 이런 기능을 담당하지 못할 때 보험제도가 탄생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보험’의 기원을 더듬어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보험 중 종신연금과 유사한 제도는 1650년에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졌는데, 그 이유는 독일과 치른 30년 전쟁의 결과로 재정이 피폐해졌기 때문이었다. 세수가 줄고 전쟁 참가자에 대한 보상 문제로 재정이 날로 심각해져 이에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연금제도를 실시하게 됐던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보험은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 장치의 고장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험 상품의 창궐은 국가에 대한 신뢰의 위기라는 문제와 일정하게 관련이 있다. 도대체 이 위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국가의 퇴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가보다 시장을 중시하기 시작한 새로운 경향, 다시 말해서 1980년대 이후로 경제구조 뿐만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인식의 틀까지 근본적으로 바꿔 놓고 있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덕분에 발생한 위기이다. 이 신종 이데올로기는 복지국가에 대한 직접적 공격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의 공포가 만들어낸 ‘비극’
 

  사회의 개조를 통해 집단적으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린 지금, 대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하는 일’이다. 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곧 자기 자신의 개조인 셈인데 그렇다고 이 같은 문제가 과거처럼 정신과 사고력을 고양해서 전인적 내면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면의 개조가 아니라 외모의 개조이기 때문이다. 성형은 이런 욕망의 물질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능시험이 끝난 2007년 11월 어느 날 어떤 성형외과 광고가 한 일간지에 실렸다. 그 광고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19살 자녀에게 어떤 인생의 길을 열어 주고 계십니까?” 생뚱맞은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어떤 인생의 선물을 남겨 주고 싶습니까? 성형은 무엇입니까?” 이 광고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이제 수능도 끝났으니 자녀들에게 성형을 통해 멋진 외모를 갖도록 해주는 게 부모의 ‘도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기존에 도덕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던 성형을 도덕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광고를 게재한 의사의 양심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의사가 이 문제를 지극히 도덕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사에게 도덕은 자연미를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자연미 자체를 인공미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모가 자식에게 줘야 할 선물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논리를 ‘정상적인 것’ 또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서다.

  보험 상품에 가입하는 일이나 자녀에게 성형수술을 해주는 것이 도덕적인 것으로 수용되는 까닭은 이런 감각적인 것의 배분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몸매가 착하다’거나 ‘외모가 착하다’는 표현은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시사점들을 던져 준다. 결국 완벽한 부르주아의 주체가 의미하는 것은 이처럼 ‘돈 많고, 착하고,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리고 한국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대중들은 이런 주체로 ‘다시’ 태어나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칼 맑스가 명확하게 밝히고 있듯이,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에게만 가혹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에게도 잔혹한 체제다. 이런 까닭에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고딕적인 공포를 내장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의 고삐를 풀어야만 우리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는 시장자유주의 판타지는 그래서 이런 공포를 느끼지 않기 위한 자기 방어 기제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시스템의 개혁을 주도하는 주체는 시스템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버릇을 갖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바로 극단적인 물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성형이나 보험 상품 구매는 ‘살 놈만 살고 보자’는 무한경쟁의 논리로 진화해 버린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물화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지금 저지르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비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이렇게 다시 고전주의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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