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하/번역가

   행동주의 심리학은 심리 기제에 대한 모형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 인지심리학에는 그런 터부는 없었지만 감정, 욕망, 도덕성 등을 제외한 좁은 의미의 인지만 연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신분석은 욕망 등을 다뤘지만 이론 검증 면에서 엉터리였다. 행동주의 심리학, 인지심리학, 정신분석 모두 인간이 진화의 산물임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사회생물학은 진화론을 인간 행동에 적용했지만 심리 기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존 투비, 스티븐 핑커, 데이비드 버스 등을 중심으로 한 좁은 의미의 진화심리학은 사회생물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진화생물학을 중시하고, 인지심리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심리 기제에 주목하며, 욕망 등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인지를 과학적으로 해명하려 한다.


   진화심리학은 성·사랑·질투와 남녀의 심리 차이 중 상당 부분이 선천적 인간 본성이며 이는 지난 수백만 년 이상 동안 일어난 진화의 역사를 파헤쳐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여러 조류의 사회과학은 그런 것들이 거의 후천적이며 신석기혁명 이후의 1만 년 역사 속에서 형성됐다고 본다. 이런 대립은 도덕성, 공격성, 집단 심리 등 온갖 주제를 둘러싸고 비슷하게 나타난다. 만약 이런 것들 중 상당 부분이 자연 선택의 직접적 산물이라면 진화론이 심리학에 요긴할 것이다.


   진화심리학은 문화인류학에 비해 보편성에 더 주목한다. 만약 어떤 현상이 인류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면 자연 선택을 끌어들인 설명이 설득력을 얻는다. 반면 후천론자는 왜 그런 현상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지 해명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과업에 직면한다.


   엥엘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결혼의 기원을 사유재산의 발달과 관련지었다. 반면 진화심리학은 인간 결혼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보며 결혼 개념을 동물에게도 적용한다. 사랑, 질투, 성교, 결혼, 강간, 규범 같은 개념을 동물에게 사용하는 것을 꺼리는 학자들이 있다. 만약 국가 기관에 혼인 신고까지 해야 결혼으로 인정한다면 국가가 없는 사회에는 결혼도 없다. 법적인 문제를 다룰 때에는 이런 개념이 쓸모 있겠지만 원시 부족까지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자는 더 느슨하게 정의한다. 동물까지 연구하는 진화심리학자는 그보다 더 느슨하게 정의한다.


   결혼하는 종의 수컷 입장에서는 아내의 자식이 자신의 유전적 자식일 때 그들을 돌보는 진화론적 보람이 더 크다. 따라서 아내가 다른 수컷과 교미하지 못하도록 하는 기제가 진화했으리라 기대할 수 있는데, 수컷의 질투가 여기에 해당하는 기제인 듯하다. 이런 질투는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결혼하는 온갖 종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또한 포유류 중에 어머니와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남매가 통상적으로 교미하는 종은 거의 없다. 그것의 주된 이유는 근친상간이 유해 열성 유전자로 인한 유전병을 유발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인간 사회에서도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가까운 친족끼리는 성교나 결혼을 하지 않는다.


   한 달 동안 포유류 수컷이 암컷 열 마리와 교미한다면 최대 열 마리를 임신시킬 수 있는 반면 암컷이 수컷 열 마리와 교미하더라도 자기 혼자 임신할 수 있을 뿐이다. 수컷이 암컷에 비해 여러 상대와 교미함으로써 훨씬 큰 번식 이득을 얻는다. 이런 선택압의 차이는 대부분의 성매매가 남자가 여자에게 돈을 주고 성을 사는 방향으로 일어나는 것과 부합한다. 포유류의 암컷은 젖을 먹이며 수컷과 달리 자신의 배에서 태어난 자식이 유전적 자식임을 ‘확신’할 수 있고, 여러 상대와 교미해도 수컷만큼 큰 번식 이득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수컷에 비해 자식을 더 많이 돌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모성이 부성보다 더 강하게, 자식 돌보기 기제가 암컷의 경우에 더 정교하게 진화했으리라 기대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비교적 그렇다.


   20세기 지식인들 사이에서 근친상간 회피 기제나 남녀의 심리 차이가 선천적임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위세를 떨쳤다. 그들은 그런 것들이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는 대중을 비웃었다. 반면 진화심리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대중의 상식들을 가설화해 검증하려고 한다. 천만 년 전 우리 직계 조상을 상상해 보자. 포유류의 패턴을 볼 때 그들에게도 근친상간 회피 기제와 암수의 심리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후천론자의 주장이 옳다면 그 후 천만 년 동안 번식에 유용한 근친상간 회피 기제가 퇴화했으며 암수가 서로 다른 환경과 선택압 속에 있었음에도 심리 차이가 사라지는 방향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진화 시나리오다. 게다가 사라졌던 그것과 비슷한 근친상간 회피와 남녀 차이 패턴이 지난 1만 년 동안 문화적으로 구성됐다면 이것은 지나친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


   이 짧은 글에서 진화심리학자들이 모은 수많은 증거들을 제시할 수는 없었으며, 그들의 주장도 거칠게 요약할 수밖에 없었다. 성, 사랑, 질투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를, 남녀 차이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기어리의 <수컷, 암컷: 인간 성차의 진화(Male, female: the evolution of human sex differences)>를, 진화심리학의 이론적 기초에 대해서는 존 투비와 리더 코스미디스의 논문 <진화심리학의 개념적 기초(Conceptual foundations of evolutionary psychology)>를 참조하라. 하나만 맛보기로 제시하겠다. 부부가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을 때에 비해 같이 지낸 시간이 5%에 불과했을 때 남편이 성교 시 훨씬 더 많이 사정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 있었다. 이것은 아내가 바람 피울 것에 대비한 적응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비진화론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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