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 한겨레신문 기자

 

기득권을 향한 욕망에서 벗어나기
 

  학벌 서열 이데올로기는 근사한 판타지다. ‘누구나 열심히 공부(투자)하면 명문대에 갈 수 있다’는 명제에 대부분 동의한다. 한 해 20조 원(2011년 교과부 조사)의 사교육비가 소비되는 까닭이다. 명문대는 곧 ‘대기업 정규직’ 수준의 노동조건을 보장한다고 인식된다. 하지만 2012학년도 수능 수험생 64만여 명 중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에 진학한 학생은 1.6%, 서울 주요 10개 대학 입학생은 4.6%밖에 되지 않는다. 1.6%나 4.6% 안에서도 ‘대기업 정규직’ 수준을 보장받을 이들은 또다시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학부모들이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1.6%나 4.6% 상위계급의 존재를 위해 나머지 98.4%나 95.4%는 짓밟힐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외쳐도,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만은 서열 꼭대기에서 나머지를 짓밟는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필요한 건 다른 통로의 삶이 어떻게 향유되는지 보여주는 체제다.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이하 통합네트워크)는 그래서 나왔다. 이 방안은 전국 30개 국공립대와 일부 사립대를 묶어 공동 학위제를 시행하면서 사실상 무상교육을 하자는 것이 뼈대다. 노동시장에서 학력과 학벌만으로 인력을 재단하는 행태가 서열 구조의 근본 토대라는 점에서, ‘학력학벌차별금지법’과 ‘동일노동 동일임금’ 제도를 만들고, 지방 공무원이나 국립대병원 채용에 해당 지역 출신 할당제를 도입해 통합네트워크 출신자 중심으로 고용하는 방안도 논의됐다. 적어도 지배계급이 되기보단 안정적인 물적 토대를 원하는 이들에게 다른 삶의 형태를 보여줄 제도다.

  하지만 통합네트워크는 논의를 펼쳐보지도 못하고 ‘서울대 폐지론’으로 왜곡돼 뭇매를 맞았다. 주된 논점은 “서울대를 폐지해도 우리는 또 다른 서울대를 재생산하는 구조 속에 살고 있다”는 반론이었다. 이 반론 뒤에는 “그런 구조는 그냥 두고 국제 경쟁력이 있는 명문 서울대를 폐지할 까닭이 굳이 무엇인가”라는 담론이 숨어 있다. 일단 통합네트워크는 ‘서울대 폐지’가 아니다. 서울대는 학부만 폐지하고 대학원 체제는 유지한다. 만약 ‘서울대 폐지’ 주장이 존속되려면 ‘서울대 학벌 폐지’라고 호명해야 정확하다. 그리고 서울대의 국제 경쟁력 하락이 우려된다는 주장에는 학부 입학생 수능 성적이 떨어질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숨어 있다. 서울대는 우수 학생 선발 효과로 유지되는 ‘명문 학벌’이었던 걸까.

  물론 서울대 학부 선발을 폐지하면 당분간 연/고대가 학벌의 정점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개혁은 체제 안에서의 실현 가능성을 냉정히 따져야 한다. 과연 국가가 사학 재단이 운영권을 가진 연겙煮釉� 정당한 방법으로 장악할 수 있을까. 당장 법원조차 사유재산권 개념에서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할 수 있는 개혁부터 차근차근 추진해야 하는 까닭이다.

  가능한 개혁은 연/고대 등 주요 사립대의 정원과 정부 보조금의 대폭 감축이다. 2010년 현재 전국 251개 4년제 대학의 중앙정부 지원 연구비 순위에서 주요 사립대는 상위 20위 안에 11곳이나 포진돼 있다. 11곳의 지원 연구비 평균이 전체 평균의 6.8배, 총액은 전체 총액의 29.7%나 된다. 이 연구비를 통합네트워크에 집중 지원하고, ‘국가연구교수제’를 활용해 국가가 3만 명 정도의 연구교수를 뽑아 일정 이상의 연봉으로 시간 강사들에게 연구에 집중할 물적 토대를 마련해 주면 통합네트워크의 경쟁력이 더욱 커질 수 있다. 사학법인의 투자가 거의 없는 사립대는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서열 구조가 단기간에 타파되진 않겠지만 점진적으로 완화될 수는 있다.

  결국 통합네트워크는 한국 사회를 뒤흔들 혁명적 제도가 아니다. 그러나 ‘서울대 폐지론’으로 담론이 왜곡되고 한국 사회를 통째로 뒤흔드는 방안처럼 호도된 것은 서울대 중심의 기득권뿐만 아니라 기득권을 노력과 실력에 따라 쟁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욕망하는 이들이 반박 대열의 핵심 주체로 나섰기 때문이다. 이제 90%가 10%를 욕망하며 10%의 얘기를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90%의 주체적인 일성을 외칠 때가 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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