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섭 /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조교수


  <편집자주> 현대에서 감정은 중요한 구조로 작동한다. 감정에는 대중들의 행위를 조종하고, 그것을 제도화하는 모종의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감정을 문화, 정치적으로 독해함으로써 감정에 내재된 구조와 억압의 기제들을 분석, 비판하고 감정이 가진 새로운 사회적 가능성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① 명랑과 긍정의 감정정치 ② 파시즘과 눈물 ③ 자본주의의 공포에서 살아남는 법 ④ 자살담론과 치유문화 ⑤ 분노하라


  이응노 <거리의 풍경-양색시> 1946
  이응노 <거리의 풍경-양색시> 1946


  감정은 삶의 매 순간마다 끊임없이 촉발되고, 그 모든 감정들에는 제각기 고유한 역할이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감정에 우열을 매긴다. 부정적인 감정은 서둘러 잊으려 하고 좋은 감정은 최대한 오래 지속시키려 한다. 심지어는 좋지 않은 감정을 그대로 둔 채 좋은 감정만을 꾸며내려 노력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상당수는 강요된 것이거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꾸며낸 것들이다. 우리의 일상은 ‘감정 관리’ 혹은 ‘감정 통제’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는 감정의 관리와 통제가 일상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근대 권력과 자본주의의 출발이 애초부터 특정 감정문화의 형성과 결부돼 있고, 그것들이 작동하는 방식 또한 감정의 위계화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근대에 들어 권력과 자본주의가 강요한 감정은 여럿이지만, 근대 한국의 ‘감정 정치’를 대표하는 것은 ‘명랑’이라는 감정이다. 지금은 거의 문어체로만 남아 있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도 ‘명랑’은 권력과 자본주의의 확성기에서 가장 흔하게 울려 퍼진 감정이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명랑’에는 ‘1)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함 2)유쾌하고 활발함’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 의미는 날씨를 표현하는 경우이고, 두 번째 의미는 사람의 성격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이다. 요즘은 첫 번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두 번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고문헌을 비롯한 1930년대 이전의 자료에서는 명랑이 두 번째 의미로 사용된 용례를 찾기 어렵다. 그러던 것이 1930년대에 이르면 반대로 날씨를 가리키는 ‘명랑’의 용례는 현저히 줄어들고, 사람의 성격이나 감정을 가리키는 용례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1930년대를 즈음하여 ‘명랑’의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자본주의로 확장된 명랑

  실제로 명랑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부터이다. 이 시기 조선 총독부는 급격히 팽창하는 경성의 도시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도시 명랑화’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이때의 명랑이란 ‘밝고 깨끗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주로 ‘명랑화’라는 형태로 사용됐다. 총독부의 ‘도시 명랑화’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됐다. 첫 번째는 도시인의 생활·교양·위생 등을 위한 시설을 갖추는 일이었고, 두 번째는 도시인의 생활과 도시 문화의 향상·증진을 방해하는 것들을 퇴치하는 일이었다. 공원과 거리를 ‘명랑화’한다는 명분하에 걸인과 부랑자들의 축출이 이루어졌고, ‘농촌 명랑화’의 일환으로 농촌의 오락물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실시됐다. 그뿐만 아니라 음반 검열을 합리화하기 위해 ‘소리판을 명랑케’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 시기 총독부가 내세운 ‘명랑’은 도시 환경 정비를 위한 구호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건전’의 동의어로서 체제에 저항하는 것들을 억압하고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만을 양성하기 위한 규율담론이었다. 총독부는 식민지 경영에 방해가 되는 것들에 대해 저급하고 난잡하며 퇴폐적이고 불온하다는 딱지를 붙였다. 그와 반대로 체제 순응적인 감정과 가치들은 모두 ‘명랑’이라는 코드 안에 편입시켰다. 그러자 ‘명랑’은 개인의 기질이나 성격을 드러내는 표현을 넘어 ‘좋은 것’을 의미하는 절대적 윤리가 됐다. 1936년 조선 총독이 된 미나미 지로는 부임 초부터 ‘명랑정치’를 표방했다. 그가 말하는 ‘명랑정치’란 명랑한 인격을 양성하는 것, 즉 조선인의 두뇌를 ‘명랑화’하는 작업이었다.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말살시키고 일본 제국주의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한 ‘두뇌 명랑화’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됐다. 첫째는 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을 체제 순응적 인간, 즉 일본 제국주의에 복종하는 ‘황국신민’으로 길러내는 것이었다. 둘째는 경찰력과 같은 물리력을 동원한 강압적 사상 통제였다. 총독부는 조선의 모든 지도급 인사들을 촘촘한 감시망 속에 얽어 놓았고, 신문·잡지·음반·영화 등 각종 매체와 오락물에 대한 검열과 통제를 강화했다. 전쟁 수행에 방해가 되는 향락적인 것들은 퇴폐적이고 난잡하다는 이유로, 체제에 저항하는 것들은 ‘불온’의 혐의로 각각 통제 목록에 올랐다. 

  1930년대에 ‘명랑’이라는 감정이 대대적으로 강조된 것은 ‘감정의 근대화’ 양상과도 관련돼 있다. ‘감정의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근대에 들어 감정에 대한 통제가 일반화됐다고 말한다. 그런데 감정에 대한 통제가 일반화된다고 해서 모든 감정들이 억압되는 것은 아니다. 고상한 혹은 교양 있는 감정은 오히려 추구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근대에 들어 급격히 증가한 ‘감정노동’이다. 서비스 및 판매 부문이 성장함에 따라 감정을 자제하고 고객에게 우호적인 감정만을 표현해야 하는 노동자가 증가했는데, 이들에게 요구된 것이 바로 감정노동이다. 감정노동은 ‘알리 러셀 혹실드’라는 사회학자가 제안한 용어로,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일부러 자신의 감정을 고무시키거나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1930년대 경성에서도 ‘감정노동’이 필요한 서비스직 종사자들이 증가했는데, 특히 여성들이 대거 진출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감정 중의 하나가 바로 ‘명랑’이었다. 당대 서비스 직종 종사자들은 ‘신경을 잃어버린 기계처럼’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면서도, 명랑이라는  감정을 연출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또 서비스업 종사자가 아닌 대중들도 의복과 화장술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명랑하게 꾸미는 법을 익혀야 했다. 이렇듯 명랑이라는 감정의 확산은 총독부의 통치정책뿐만 아니라 당시 경성에서 전개된 자본주의와도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다. 명랑에 대한 총독부의 강요가 식민지 차원의 ‘감정관리’ 혹은 ‘감정통제’ 양상이라면, 그것을 넘어서는 ‘보편적 근대’ 혹은 자본주의 차원의 감정관리 양상 또한 1930년대 경성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명랑은 강압적 통제를 정당화하려는 총독부의 통치 이데올로기이자, 감정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새롭게 강조된 감정들 중 하나가 식민지 조선에서 얻은 특수한 이름이었다. 식민지적 억압과 자본주의의 진행이라는 사건이 맞물리면서 명랑의 의미는 확장됐고, 그 활용도 또한 증가했던 것이다.
 

명랑 아닌 공감으로

 
  해방 이후에도 ‘명랑정치’는 이어졌다. 특히 박정희와 전두환이 집권하던 기간 동안 ‘명랑화 운동’은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그 시절의 ‘명랑’이란 정권에 저항하는 소위 ‘불순분자’들이 없는 상태를 의미했다. ‘명랑화운동’은 체제에 무조건 복종하는 국민을 육성하려는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산물이었다. 국가가 만든 표준화된 윤리는 ‘건전’이라는 말로 포장됐고, ‘명랑’은 바로 ‘건전’의 동의어였다. 명랑이라는 말은 항상 타자의 언어였던 것이다. 20세기가 다 가도록 명랑해서 명랑하다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명랑하지 못하더라도 명랑해져야 한다는 강요만이 끊임없이 반복됐다. 자신의 진실한 감정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가 강요하는 대로 순응하는 것이 명랑한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래서 명랑하지 않은 시절일수록 ‘명랑운동회’는 빠짐없이 열렸고, 사람들은 감정을 나누고 공유하는 법보다 감추고 꾸며내는 법을 먼저 배우게 되었다. 

  21세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명랑화’라는 말은 사라졌지만 ‘명랑화’는 이름을 바꿔가며 여전히 진행 중이다. 언제부턴가 세상은 무조건적인 긍정을 강요하고 있다. 모든 매체가 나서서 긍정적인 생각만 가지면 못해낼 일이 없다고 떠들어댄다. 20세기 내내 명랑을 강요함으로써 비판과 저항을 봉쇄했던 것처럼, 권력과 자본은 여전히 긍정을 내세워 체제의 구조적 결함을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버린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제 몫이 아닌, 제 탓이 아닌 아픔에 대해서는 아무도 따지지 않는다.  

  슬플 때면 대부분 슬픈 음악을 찾는다. 밝고 활기찬 음악보다 어둡고 무거운 음악이 슬픔을 달래는 데 훨씬 효과가 있는 이유는 공감 때문이다. 어찌 할 도리 없이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섣부른 낙관이 아니라 지극한 위로이다. 슬픈 음악은 자신의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는 느낌, 그래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결코 혼자는 아니라는 안심과 위로를 제공한다. 기만적인 명랑과 긍정만으로는 결코 슬픔과 아픔을 치유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감정마저 마비시켜 버리는 ‘박카스’ 한 병이 아니라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공감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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