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미 / 사회학과 박사수료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젠더로서의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성별역할의 이분법이 결코 주체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체계 내부에서 구성돼 왔으며, 그 체계란 역사적으로 문화적 정의나 고정성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는 프로이트와 푸코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이분법적 대립의 구조에서 여성성이 결핍과 비남성의 위치에서 남성주체의 현존을 강화, 유지하는 도구로 정의돼 왔음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남성성의 신화를 해체할 수 없다는 것을 남성성의 역설로 다시 드러낸다. 아마도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범주를 등가로 환원하려는 자유주의적 경향에서는 이 계급적 대립구조의 분열을 위한 지렛대의 지점을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퀴어의 쟁점이 이 구태한 젠더의 허구적 이분법의 체제에 균열을 가져올 것인가?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상징질서는 교환을 통해 전체로서의 문화제도라는 환상 내부에서 각자의 일반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이때 교환가치를 조직하기 위해서 대상들의 질적 가치들의 표준화된 추상화와 치환이 반드시 작동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치환과 교환의 구조를 맑스가 정교화한 화폐형식의 기원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고, 경제적 가치가 아닌 곳에서라도 대상의 질적 특질을 추상화해서 교환의 형식으로 만드는 구조는 프로이트와 라캉주의에서 팔루스의 위치를 중심으로 하는 욕망의 표준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언어에서의 음성중심주의 또한 그렇다. 이 모든 경우에서 위계는 배제된 것들과 이상화된 것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측정해 교환하면서 조직된다. 아버지는 주체의, 언어는 기호의, 팔루스는 대상의 일반균형을 위한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 마치 금이라는 특정한 대상이 모든 재화의 측량과 계산의 기준이 됐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교환의 시장성을 바탕으로 이리가레이는 문화 질서가 남성 사이의 여성 교환이라는 이성적 경제에 의해 가려진 동성적 질서라고 이야기한다. 이성성은 남성 간의 관계가 부드럽게 작동하도록 해주는 알리바이일 뿐이며, 재생산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서의 여성은 이와 같은 상징 질서를 지탱한다. 여성은 질적인 방식이 아니라 양적 방식으로 추상화돼 교환되는 상품으로 다뤄지는 것이다. 여성의 교환가치는 남성 가치의 모방적 표현인 것이며, 이러한 상징 질서에서 여성 신체는 남성들 사이의 교환을 위한 욕망의 거울 역할을 하게 된다. 동성 관계는 이 매개를 통해 완전히 은폐돼 드러나지 않는데, 표준적인 가치인 팔루스가 유지되고 축소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은폐돼야 하는 것이다. 여성의 신체가 교환될 때 교환의 기초가 되는 제3의 항이 팔루스이며, 팔루스를 기준으로 유지되는 상징의 위계와 질서에서 동성 간의 차이나 비이성애적인 항들은 더욱 가치를 가질 수 없이 무기(無記)의 영역으로 침잠한다.  

단지 젠더의 이분법을 다항 간의 균열로 전복하는 것이 문제의 전부일 수 없다. 이분법의 독트린을 깨기 위해 동질화된 가치에서 소외된 대상들을 또 다른 범주로 구성하고 그것에 등가의 법칙을 적용하려는 것으로는 저 팔루스의 항을 전복할 수 없다. 나 역시 정치적으로 동성결혼을 지지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동성애자가 결혼할 필요는 없다. 결혼이나 시민이라는 문화적 질서에 진입하는 것, 혹은 남성주체의 현존을 강화 유지하기 위해 현존-부재로서 억압되고 삭제된 모든 차이들을 등가로 사유하고 팔루스와 대등한 교환가치를 갖게 하려는 움직임이야말로 팔루스를 강화할 뿐이다. 팔루스를 제거하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팔루스가 되고자 하는 노력이야말로 가장 자유주의적이며 자신의 진본성을 집어던지는 손쉬운 길이니 말이다. 어떻게 프로이트의 이분법적 구조를 해체할 것인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먼저 세계를 범주로 인식하고 모든 범주의 추상화된 형식을 다른 범주들과 교환하며 가치를 구성하는 사유습관에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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