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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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학술
파국에 대항하는 소설, 픽션의 동역학박상수 / 시인, 문학평론가
황인찬 기자  |  mirion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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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호]
승인 2012.04.27  16:5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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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2009)는 한 번 펼치면 쉽게 책장을 덮을 수 없는 엄청난 흡인력을 가진 소설이다. 기왕의 하루키 문학의 다양한 소재와 테마들이 집대성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소설은 남자 주인공인 덴고와 여자 주인공인 아오마메의 교차서술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들이 문득 발을 딛게 된 이상한 세계, ‘1Q84’(1984년이 아니라)라는,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가공의 세계를 통해 일본 사회의 지독한 환부와 축적된 시스템의 모순, 그 안에서 상처받은 개인이 어떻게 자신이 받은 고통을 사회에 되돌려주며, 끝내 불특정 다수를 향한 거대한 원한과 폭력에 동참하게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이비 종교의 성격이 강한 ‘선구’의 존재일 것이다. 1960년대 일본 ‘전공투’를 이끌었던 학생운동 집단이 ‘리틀 피플’이라는 존재의 지배를 받는 미스테리한 종교집단으로 변질된 것이 바로 ‘선구’이다. ‘선구’는 종교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를 지향하는 세련된 외양으로 수많은 신도를 끌어 모은다. 특이하게도 신도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로 인텔리 계층이다.

“깨끗한 시설, 세련된 홍보, 요가와 마음의 평온, 물질주의의 부정, 유기농법에 따른 농업, 맑은 공기와 신선한 채식 다이어트”(<1Q84>, 1권, 615쪽)처럼 뉴에이지와 카운터컬처, 60년대 미국의 히피문화의 분위기를 적당하게 섞어놓은 것이 ‘선구’의 외양이지만 실은 리틀 피플로 상징되는 폭력과 악에 의해 철저하게 조종되는 ‘리더’가 자기에게 몰려든 사람들을 감화시켜 폭력과 악을 더욱 널리 전파하는 매개 역할을 하는 조직이 바로 ‘선구’이기도 하다. ‘리더’는 자신의 목숨을 파괴시켜야 함을 자각하지만 동시에 이 형체 없는 지배자, ‘리틀 피플’이 시스템을 절멸시키고야 말 것임을 예감하고 있는 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것처럼 하루키 소설의 이 ‘선구’라는 집단이 일본의 실제 사이비 교단이었던 ‘옴진리교’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많은 논자들과 하루키 자신에 의해 ‘옴진리교’와 ‘선구’의 유사성이 언급된 바 있지만 이에 대한 설명은 그의 산문 ‘도쿄 지하의 흑마술’(<잡문집>, 2011)에서 비교적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95년 5명의 변장한 행동대원들이 출근길 도쿄 지하철에 사린 독가스를 살포한다. 이 테러 사건으로 출근길의 무고한 시민 12명이 죽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5명이 모두 옴진리교의 신도임이 밝혀지면서 일본 열도가 발칵 뒤집히게 된다. 하루키 역시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고 “① 종교단체가 교의의 연장선상에서 일으킨 ② 특수한 독가스 병기를 쓴 계획적 범죄였으며 ③ 사실상 일본인이 일본인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일본이 ‘세계에서 유례없이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라는 공유관념의 붕괴였다”(‘도쿄 지하의 흑마술’, 222, 이하의 인용 출처는 모두 이 글임)고 말하면서 충격 속에서도 일본 사회를 차근차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서 인간이 인간을, 그토록 엄청난 적의와 증오로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돌연변이인가, 시스템이 낳은 필연적 결과인가?

놀라운 것은 5명의 행동대원이 ‘심장외과 전문의’, ‘와세다대학 응용물리학과 대학원생’, ‘도카이대학 응용물리학과 전공자’, ‘도쿄대학 이학부 응용물리학과 출신의 박사과정생’, ‘고가쿠대학 인공지능 연구자’였다는 점이었다. 한 명은 전문직 종사자였으며 나머지 네 사람은 이과계열의 학생으로 이제 막 사회적 진출을 앞두거나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고, 이들은 모두 30대의 사람들이었다. 고등교육의 수혜를 받고, 일본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자발적으로 직업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전 재산을 교단에 기부하고, 교주인 ‘아사하라’의 명령을 일방적으로 쫓아 무차별 살인을 감행하게 됐는가. 하루키는 이들이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의 시대 이후에 등장한 ‘뒤늦은’ 세대”로 이들이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커다란 정치적, 문화적 운동이 끝난 뒤”였으며, “기득권층이 다시금 권력을 손에 넣”은 때였다고 분석한다. 90년 초까지 지속됐던 거품경제의 영향으로 소비에 몰두하던 이들은 “타자와의 차별성을 중시했”고 “남들과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음악을 듣고, 다른 책을 읽는 것을 지향했”지만 또한 이들은 “강력한 아우라를 가진 누군가가 시스템 밖에서 나타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신선한 공기를 안으로 불러들여, ‘개별적 차이니 뭐니 그런 성가신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리로 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말을 건”네기를 기다렸던 빈약한 내면의 세대이기도 했다.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무차별 테러의 가해자인 이들과 테러의 피해자들 간의 대비이다. 하루키가 보기에 테러의 희생자들인 출근길 시민들은 오히려 90년대 초반 일본의 거품경제가 꺼지는 와중에 그 피해를 가장 먼저, 고스란히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수입은 두 배가 되었지만 “땅값은 그보다 훨씬 더 뛰어올라 사람들은 직장 가까이에서 제대로 된 집을 살 수 없”었고 “매일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씩 살인적인 만원전차에 시달리며 출퇴근하고, 대출금을 갚기 위해 시간 외 근무까지 하며 소중한 건강과 시간을 소모했”을 뿐만 아니라 “직장 내 경쟁은 혹독해서 유급휴가도 변변히 받을 수 없었”다. “밤늦게 귀가하면 아이들은 이미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주말과 휴일은 주로 피로를 풀기 위한 휴식으로 소진”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하루키가 인터뷰했던 한 직장인은 “굳이 누가 사린을 안 뿌리더라도 이 전차에서 사망자가 안 나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예요”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이들이 감당해야 했을 과중한 피로와 사회적 박탈감, 우울을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 와중에 옴진리교에 귀의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은 이런 식의 사회화에 순응하지 않고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 테러였다. 결국 하루키는 이 파국이 돌연변이가 아니라 시스템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보았다. 그는 60명이 넘는 피해자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언더그라운드>라는 책을 썼고, 논픽션은 그의 내면에 침잠됐다가 <1Q84>라는 세 권짜리 픽션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1Q84>를 통해 하루키는 폭력과 악의 전염이 불러일으키는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관계의 회복과 사랑만이 해답이라고 하지만 실은 한 가지 해답이 더 있다. 바로 ‘소설’이다. 소설도 픽션이고 종교도 일종의 픽션이다. 다만 그 결말이 다르다. 소설을 읽는 자는 언젠가 끝이 있음을 알고, 책장을 덮고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매력적인 픽션과 고통스런 현실을 상호교환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픽션이 아닌 현실에서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된다. 소설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사이비 종교는 다르다. 만들어낸 허구를 폐쇄적으로 체계화하여 오직 그것만을 믿게 하고 다른 탈주로를 닫아버린다. 마침내 교주의 개인적인 픽션에 전 인격이 먹혀들게 된다. 소설이라는 가짜, 혹은 픽션, 혹은 이야기에 많이 노출된 사람은 실감적으로 그 이야기가 허구인지 현실인지를 구분하며 양자의 간격을 조절해나갈 수 있지만 소설을 읽지 않은 자는 이에 대한 구별 능력이 없어서 금세 ‘버그’에 오염되고 마는 것이다. 자기 신념에 대한 가장 투명한 믿음이 악의 동력으로 변질될 때, 신념 또한 하나의 픽션이며 거리조정이 필요한 대상임을 알려주는 분별의 동력이 바로 소설에서 나온다.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바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덴고의 글쓰기가 아오마메와 연결될 때, 비로소 구원은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굳이 누가 사린을 안 뿌리더라도 이 전차에서 사망자가 안 나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예요”라는 말은 일본뿐만 아니라 2012년 대한민국, 악화되어만 가는 생존조건에 대한 완벽한 비유가 아닌가. 최근 5년간 노동자 22명이 죽은 어떤 사건을 가장 우수한 모범 수사 사례 중 하나로 발표하는 웃지 못할 공권력의 나라에서, 왜 우리는 하루키 같은 작가를 가질 수 없는 것인가 더 물어야 할 것이다. ‘해고는 살인’이기에 ‘함께 살자’고 외쳤던 자들의 목소리. 그리고 더 많은 낮은 자들의 목소리. 우리 사회에 가득한 힘없는 자들의 분노가 제 방향을 찾지 못하고 축적되기만 하는 이때에, 우리 문학은 어떤 ‘이야기’로 이들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하루키를 읽으며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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