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



  용산 전쟁기념관에 위치한 6.25탑
  용산 전쟁기념관에 위치한 6.25탑


  “당신은 옷 입고 있는 여자를 그리면서도 마치 나체와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화가예요.” 이는 클림트의 삶을 그린 영화 <클림트>(감독 라울 루이즈, 2006)의 시작에 나오는 말이다. 관능과 황홀로써 표상되는 클림트는 21세기 대중예술의 스타이다. 

  그러나 나는 빈의 오스트리아 미술관에서 <키스>를 보았을 때, 육체적 관능이나 열정적 몽환이 아니라 너무나 성스러운 사랑의 정신적 결합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순수한 신비와 위엄에 압도됐었다. 옷을 입은 그들이 나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는 커녕 그들의 모습은 배경 속 자연의 일부가 돼 하늘 끝까지 황홀한 키스의 느낌으로 날아오르는 듯 했다. 

  그 정지된 시간, 밀폐된 공간의 정적 속에서 나는 내가 평생 사랑하고 키스한 사람들을 꿈속에서처럼 회상하며 다시 만났다. 그런 황홀감을 그림을 보는 모든 이들과도 함께 맛보는 듯했다. 그해 봄, 그 그림 앞에서 우리 모두는 클림트가 주도해 만든 빈 분리파의 기관제목이기도 한 “성스러운 봄”처럼, 말 그대로 정적의 우주에서 숭고하게 서로 키스를 하듯 행복했다. 미술관에서의 행복이란 정녕 그런 것이다!

  두 남녀 모두 무릎을 꿇고 껴안고 있는 모습에서 남자의 다리는 숨어 있다. 황금빛 배경은 별이 반짝이는 하늘같다. 금박의 작은 사각형들이 남성의 성기처럼 보인다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전체 분위기는 도리어 종교적이다. 실제로 클림트의 황금색은 비잔틴 모자이크 이콘화나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다.
 
   남녀의 포옹 자태가 남성의 능동적 주도에 비해 여성이 수동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두 남녀 모두 무릎을 꿇고 있으므로 능동과 수동의 구분은 그리 분명하지 않다. 사실 클림트는 당대의 ‘어머니인 대지’를 중심으로 한 모권제 사회관을 가졌기 때문에 반드시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만 보지는 않았다. 남녀가 꿇어앉은 꽃밭 언덕은 절벽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절벽의 끝에서 힘을 주고 있는 여성의 발가락에서 여성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음을 읽어내는 사람도 있지만 그림 전체로 보면 그런 위기의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단적으로 이 그림은 대단히 엄숙하여 우주적이고 종교적인 느낌이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구 끝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두 사람만의 충만한 사랑으로 가득 찬 우주와 같은 것이다. 이처럼 클림트의 세계는 “더 없이 즐겁고 황홀한 행복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이 그림을 두고 함부로 관능, 섹스, 에로를 운운해서는 안 된다. 영원히 고귀하고 숭고하며 품위 있는 사랑을 정적의 조화 속에서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전체의 화려한 황금빛도 영원한 사랑의 숭고함, 현실 초월이라고 해도 좋을 숭엄한 사랑의 결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색채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는 평생 속세의 상업주의에 반대하고 그것을 초월하는 삶과 예술의 자유와 숭고함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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