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기 / 한국외대 외래교수


과거의 기억과 그것의 공간적 재현은 일종의 정치성을 함의한다. 따라서 과거의 기억과 그것이 재현되는 공간을 문화, 정치적 시각으로 조망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기억과 공간의 정치문화사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현재 한국 사회의 기억과 공간의 재현 방식을 성찰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 ① 북한과 극장국가   ② 광화문 광장의 정치문화사  ③ 추모공간과 전쟁기념비  ④ 다크투어리즘  ⑤ 어떻게 기억을 재현할 것인가



  용산 전쟁기념관에 위치한 6.25탑
  용산 전쟁기념관에 위치한 6.25탑

  전쟁은 인류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됐고, 인간을 ‘이성’과 ‘합리성’의 담지자로 사유했던 근대 이후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와 전쟁의 역사가 같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배경과 이유는 다양하지만, 연구 분야에 따라 주목하는 지점은 달랐다. 전쟁에 관한 대다수의 연구는 기원과 발단, 전투의 전개, 승패 요인 분석, 결과와 교훈 등을 다뤘다. 전쟁 방지와 평화 유지 등에 관한 연구도 간혹 있었으나, 문제의식은 앞선 연구들과 별 차이가 없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한편 전쟁은 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학문들에서도 연구됐다. 문화사와 사회사 등이 대표적이다. 연구자도 현저히 적고 성과도 많지는 않으나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와 효과를 지닌 학문 분야로 위상을 정립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생존 기반을 파괴하고, 목숨을 빼앗는 전쟁 행위를 정당화하는 명분과 논리 및 기제가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는지 주목했다. 즉 동조하거나 동원이 가능했던 인식과 심리에 대해 규명하려 했다.

  ‘전쟁기억’은 이러한 관점을 잘 보여주는 주제이다. 전쟁기억을 주제와 소재로 하는 각종 시설과 공간은 기념비(탑), 집단묘지, 위령비(탑), 충혼비(탑), 참전비(탑), 기념관 등인데, 여기에는 정치적 의미와 중층적 사고, 그리고 복합적 관계가 함축돼 있다. 전쟁기억의 시설과 공간은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것이 주류를 이루지만 건립과 조성의 배경과 목적은 균일하지 않다. 정치체제의 변화와 시대의 전환에 따라 전쟁기억은 다양한 담론들로 부각됐다.

  전쟁을 치렀던 대부분의 국가들과 같이 한국에서 전쟁기억의 시설과 공간은 전국에 분포한다. 군 단위 이상의 자치단체에는 현충탑이나 충혼탑 등으로 명명되는 시설들이 대부분 건립돼 있다. 이외에도 전국 곳곳에 다양한 명칭과 형태의 시설과 공간이 있다. 2005년에 수행했던 현지조사에 의하면 지리산에 인접한 전북 남원과 경남 하동에는 각각 20여 개의 시설과 공간이 있었는데 현재는 그때보다 크게 늘었다.
 
   사람들은 전쟁기억의 시설과 공간을 흔히 현충비 또는 현충탑이라고 명명하지만, 거칠게 살펴봐도 명칭과 건립 목적과 형태가 동일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을 기억하는 주체와 담론이 복수이며 시대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는 전쟁기억이라는 것이 여러 담론들의 혼성체이며 전쟁의 기억에 대한 입장과 견해, 그리고 이해관계 등에 따라 다양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쟁기억과 담론의 다양성

 
   전쟁기억의 시설과 공간 건립에 중요한 원초적 자원은 한국전쟁이다. 그런데 그 전에도 전쟁기억의 시설이 건립됐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38선과 그 이남 지역에서 전투와 충돌이 무수히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추모 의례를 개최했다.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시설들의 외형은 식민지 시기와 다르지 않았고 추모 대상은 국가 기구의 구성원이었거나 동원됐던 사람들이었다. 당시는 국가 차원에서 새로운 의례의 정립과 시설 및 공간의 건립 방안이 구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설이 표상하는 담론은 ‘충혼’보다 ‘위령’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한국전쟁은 전사자의 시신과 영혼을 어떻게 대우하고 처우할 것인가를 숙고하게 했다. 전쟁을 수행하거나 예비하는 국가라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고민해야 하는 대상이 전사자였다. 그래서 전투에서 한 걸음 빗겨선 곳들을 중심으로 관련 시설이 건립됐고, 추모 공간의 조성을 모색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국가는 이에 대한 체계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시설의 담론은 위령과 추모가 압도적이었고, 전쟁 이후에도 유사했다. 국가와 지역사회는 위령비를 건립해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담론을 확산하는 데 역점을 뒀다. 한편 휴전 직후부터는 국립 현충원의 기원이 된 군인묘지 조성을 본격화했다. 이승만 정부 말기에는 전적비 건립이 주안점으로 떠올랐다. 전적비 건립은 전장에서의 전투 행위에 대한 회상과 사건의 영속화를 위한 담론이 중요성을 획득했음을 의미한다. 외형상으로는 위령비와 전적비가 거의 구별되지 않지만, 건립 장소는 달랐다. 위령비가 사람의 시선을 끄는 곳에 주로 설치됐다면, 전적비는 대규모 또는 중요한 전투가 전개됐던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해 접근이 여의치 않던 장소에 주로 설치됐다. 

  군부 출신들이 장기간 정부를 장악한 것은 전쟁기억의 국가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특히 박정희 군사정부의 집권은 전쟁기억의 대중화에 호재였다. 군사정부는 이전과 다른 전쟁기억의 시선들을 제시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외국군과 이들의 전투 행위를 기념하는 것인데, 이는 시설의 건립으로 구체화됐다. 이것은 한국전쟁에서 남한이 국제적으로 더 많은 지지를 받았음을 명시하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한국전쟁은 한반도에서 전개된 국제전이었고, 동아시아 냉전체제와 질서의 고착화 과정이었음을 드러냈다.

  박정희 정부 말부터 전두환 정부 초까지 전장은 교육을 위한 공간의 관점에서 파악됐다. 앞서 건립된 전쟁기억 시설과 공간도 교육에 활용될 수 있었으나, 전쟁기억에서 교육을 명시화한 것은 이전과 다른 문제의식의 등장을 의미했다. 전쟁 체험자가 사회구성원의 다수를 이루고 있으나 머지않아 감소할 수밖에 없으며, 전쟁에 대한 비국가적 기억화가 진행될 수 있음을 인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전쟁 세대들과 체험자들이 점차 감소할 것인데, 이것은 전쟁 담론을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군사정부들에게는 부담이자 해결 과제로 인식됐던 것이다. 또한 교육의 시선이 ‘지구(地區)’와 같은 공간의 관점에서 고찰됐다. 이는 시설과 공간의 구성과 내용에도 변화를 촉진해 기념관과 같이 보다 직접적이고 다량의 정보를 전달할 방안들이 구체화됐다. 전쟁기념관 건립은 이런 흐름의 정점인데, 이후 전국에 유사 공간들이 크게 확산됐다.

  문민정부 이후에는 한국군 참전이 기억의 대상으로 주시됐다. 참전이라는 시각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모두를 망라했다.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이하여 활성화됐던 이 시선은 2000년대 전쟁기억의 주류가 됐다. 따라서 근래에 건립되고 있는 전쟁기억의 시설과 공간의 상당수는 이를 주제로 하는 것들이다.
 

이제야 겨우 시선이 드리운 학살된 영혼들


  이와 같이 전쟁기억의 시설과 공간은 여러 담론들로 구성돼 있으며,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새로운 기억 담론의 부상을 통해 확장돼 왔다. 그러므로 전쟁기억의 시설과 공간이 표상하는 담론은 동일한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여러 차이들의 결합물인 것이다. 이러한 시설과 공간의 담론은 전쟁기억의 일부이며, 국가화 담론으로 재호명되어 전유되고 있다.

  그동안 배제됐던 전쟁기억이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사회구성원 다수가 인지하고 있었으나 모른 체 했던, 왜곡되거나 반전된 사실로 전래됐던 민간인의 죽음이 그것이었다. 민간인의 죽음에 대한 국가적 재인식은 전두환 정부에서 주목된 적이 있었는데, 북한군과 좌익이 가해자였던 사례들로 국한됐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정치와 사회의 민주화가 다소 진전되자,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또 다른 성격의 민간인의 죽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족과 시민사회는 이들의 죽음을 추모하고 진상을 기록한 시설을 건립했다. 이 흐름은 점점 확산됐고, 국가 차원에서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발생한 민간인의 죽음을 재조사하는데 기반을 이뤘다. 이 활동은 전쟁 체험 세대들의 죽음이 임박한 무렵에 어렵게 이뤄졌지만 오랜 기다림의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시설과 공간에 명시되지 않아 보다 영구적 재평가로 귀결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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