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



                     ▲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이삭줍기(Les glaneuses)>


 영화 <완득이>(감독 이한, 2011)에서 완득이는 미술 시간에 밀레의 <이삭줍기> 속 여인들이 외국에서 온 여성들이고 그 곳에서는 천대받지 않고 공부를 많이 해서 존경받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필리핀에서 온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한 말이지만 그림이라는 것이 자신의 눈으로, 또는 시대의 눈으로 얼마든지 달리 보일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좋은 보기이다. 심지어 지금 밀레는 자본주의의 상표이자 사회주의의 상징이기도 하다. 가령 그의 <씨 뿌리는 사람>은 미국 은행의 등록상표이자 동시에 중국과 쿠바의 혁명을 상징한다.

<이삭줍기>도 그렇다. 1857년 살롱에 출품된 <이삭줍기>에 대한 비평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보수파는 현실 비판으로써 1793년의 민중봉기와 단두대 같은 사회 불안을 야기한다고 보았다. 반면 진보파는 농촌 노동의 가혹함을 자연주의적으로 솔직하게 표현한 예술가의 영웅적인 작품으로 평했다. 그러나 밀레는 특정한 정치적 신조를 부정하고, 당시 정부가 물질적 번영과 행복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주장한 것을 비판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의 위쪽 지평선에는 지주의 마차가 보리다발을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으나, 전면의 세 여인은 마지막에 남아있는 이삭을 줍고자 허리를 굽히고 있다. 이는 당시의 관중에게 농민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밀레는 최초로 농촌을 그린 사람은 아니지만 종래의 아름다운 농촌 자연이나 즐거운 농촌 축제 그림과는 달리 농민, 그것도 뛰노는 농민이 아니라 일하는 농민, 즉 노동하는 인간을 그린 점에서 최초의 참된 농민 화가였다. 그것은 토속적, 서정적, 낭만적, 신비의 농촌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회고적인 고향이나 전원의 정경도 아니다. 그냥 일하는 현장이다.

이 농민상은 밀레의 독창적인 천재성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1848년의 혁명이 창조한 인간상이다. 문학이나 미술에서 농민의 노동이 중요한 주제가 된 것은 1848년 이후이다. 그 혁명은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를 그 시대의 인간상으로 부각시켰다. 혁명은 혁명 자체의 우상화가 아니라 꾸밈없는 자연과 그 자연 속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의 존엄성을 찬양하여 인간적이고 대중적인 주제로 승화시켰다. 혁명은 화가들에게 거리와 들판을 관찰하게 했고 그들을 비천한 사람들의 열망과 감정에 결부시켰다. 과거에 신과 왕, 그리고 귀족들에게 헌신했던 미술이 이제 노동자, 농민에게 헌신하게 된다.

당시의 화가들에게는 노동자보다 농민이 훨씬 가까웠다. 왜냐하면 당시 인구의 3분의 2가 농민이었고, 그들이 동시에 노동자였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흙과 공장에서 동시에 노동했다. 당시의 노동자들은 모두 농촌의 영세한 수공업 공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농민과 노동자들은 사실상 구분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농민화는 바로 노동화였다. 노동주의의 위대한 선언인 점에서 밀레는 위대한 화가이다. 밀레는 농민 생활, 아니 삶의 진실을 추구했다.

물론 영화 <완득이>에서 이와 같은 당대 프랑스의 농촌 현실을 정확하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완득이>의 관점은 이미 시작된 프랑스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해 프랑스의 하층 노동력으로 강제 동원된 식민지 사람들의 고통과 차별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또한 당시 프랑스의 하층 노동력이었던 동유럽 사람들이나 집시로도, 아니 현재의 차별 받는 모든 노동자와 농민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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