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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한 ‘시간강사’의 죽음이 화제가 됐었다. 그는 “만약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처지이면, 살지 않으리라”는 쪽지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의 유서에는 ‘열심히 강의하고 논문을 쓰면 학교에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는 마음이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대학사회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믿어왔던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굳게 믿지 않으면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는 유학생활과 연구의 지난함 끝에 남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을 예민한 개인의 파토스에서 비롯된 사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학기 단위로 계약하는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놓여 있었고 종종 인격적인 모독까지 감당해야 했다. 당시 연일 뉴스의 한 대목을 차지하던 그의 이름이 지금은 사라졌지만, 문제는 계속되고 있다. 국회 앞에선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의 강사농성이 이어지고 있으며, 학교법인에 비판적이었다는 까닭으로 퇴출당한 교수가 캠퍼스 내 거리강의를 한다. 다만, 누군가 죽지 않았을 뿐이다. 일련의 현상들은 엄연히 교육현장의 고용유연화가 불러온 비극이다. 연구 환경을 보장받기는커녕 연구 분야와 하등 관련 없는 강의를 떠맡고, 그마저도 학기 단위로 조바심내야 하는 수많은 강사들의 처지는 생산수단을 전혀 소유하지 못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와 다름없다.

‘고등교육법 일부 개정안’ 이후, 본교에서도 시간강사의 처우 개선을 위한 결과로 강의전담교수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그 제도가 ‘기존 시간강사의 처우 개선’을 향해 적극적으로 기능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가령 새로운 강의전담교수가 채용되며 기존의 시간강사들이 도리어 일자리를 잃기도 했다. 교양 강좌의 경우 그 수가 줄어 교수 1명 당 담당하는 학생이 늘어났고, 이는 수업의 질 하락으로 이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본교의 강의전담교수 제도는 대학사회의 오랜 상처였던 시간강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라기보다는,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로 보인다. 그것은 정교수와 시간강사 사이에 이름만 추가한 모호한 계급이 될 수도, 이름만 바뀐 공허한 기호가 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의 이른바 고용유연화가 같은 노동자 사이에서도 계급을 구분했듯, 강사들 간에도 새로운 권력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닐까. 과거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한 ‘보따리 장사’의 망령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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