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 영화감독

  “잘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촌스러운 옷차림에 우스꽝스러운 바가지머리를 한 승철이 소처럼 순한 눈을 연신 꿈뻑거리며 말한다. 사장은 조용하고 우직한 인상의 그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만, 그의 주민번호 뒷자리가 125로 시작된다는 사실(새터민)을 확인하자 냉정히 거절한다. 승철은 자신이 마신 찻잔을 직접 설거지해놓고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나온다. 그리고 다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도로 위로 위태롭게 몸을 날려 포스터를 붙이는 시간당 2천 원 벌이의 ‘무산계급자’의 삶으로 돌아온다.

  고된 환경 속에서도 승철은 친구의 도둑질을 질타하고, 불의에의 동참도 단호히 거절하는 등 도덕적 양심을 지키려 애를 쓴다. 그는 좋아하는 교회 아가씨를 따라 예배도 참석하고 일도 열심히 돕지만, 결국 마음에 깊은 상처만 받는다. 유일하게 애정을 쏟아 키우던 강아지는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친구가 갖다 버린다. 사장의 구박과 착취는 점점 심해지고, 동네 토박이 깡패들의 협박과 폭력은 그를 궁지로 내몬다. 아무리 노력해도 승철은 자꾸만 빼앗긴다. 귀순한지 1년, 승철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남조선에서의 새로운 삶은 옥수수 하나에 친구를 죽음으로 내몰아야 했던 고향에서의 비참한 삶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이 고지식하고 순박하기 그지없는 탈북자 청년 앞엔 다만 황량하고 메마른 자본주의 도시의 살풍경만이 선연하게 끝없이 펼쳐질 뿐이다. 

<무산일기>(감독 박정범, 2010)
<무산일기>(감독 박정범, 2010)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2010)가 그리는 한국 사회는 충격적일만큼 황폐하고 척박하다. 목숨을 걸고 고향 ‘무산(茂山)’을 탈출한 승철에게 남조선은 다만 생활양식과 생존논리가 조금 다른, 또 다른 ‘무산(無山)’일 뿐이다. 난민에게조차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를 들이밀며 ‘자본주의 세계는 원래 이래. 적응하지 못하는 네가 잘못된 거야. 편입하든, 죽든, 혼자 책임지고 알아서 해’라고 강요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참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적자생존의 비정한 사회 속에 던져진 이들은 단지 탈북자들만은 아니다. 승철을 폭행하던 동네 깡패들 또한 자신들보다 더 하위의 최하층 약자를 찾아 분풀이 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약자이자 피해자들이다. 그래서일까. 깡패들이 작은 커터칼로 승철의 새 나이키 점퍼를 찢어 하얀 털이 삐져나오던 장면은 칼이 피부를 파고들어 피가 배어나오는 장면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진다. 약자가 약자를 공격하고, 희생자가 또 다른 희생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는 이 잔혹한 현실에서 탈출할 방법은 그들을 둘러싼 황폐한 풍경처럼 그저 막막하고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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