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응 / 영문학과 교수

19세기에 디킨즈가 쓴 <어려운 시절>(1854)에서 교장은 교사들에게 “아이들에게 사실만을 가르치세요. 사실만이 삶에서 필요한 것입니다”라는 교육지침을 시달한다. 21세기의 대학 총장은 교수들에게 “수치만이 중요합니다. 대학 순위를 올려야 합니다. 논문 편수를 늘리십시오. 연구비를 더 받아 오십시오”라고 할 것 같다. 21세기의 대학은 이제 수치가 지배하게 되었다. 

빌 레딩스는 <망가진 대학>(1996)에서 현재 미국 대학은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연구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미국 대학의 관심거리는 대학평가 순위, 예산의 규모, 연구비 수주액, 강의평가 점수, 논문과 저서의 수 등 수치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대학이 전통적으로 추구해 왔던 인간의 성숙과 보편적 학문의 발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됐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그는 대학이 망가졌다고 한다.

레딩스가 말하는 망가진 대학은 한국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국 대학은 한국 대학의 규범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학의 운영자들은 대학 평가순위, 예산 규모, 발전기금, 논문 수 등 수치에만 관심을 둔다. 학생들은 학점, 공인영어 시험 성적 등 수치로 표시되는 자신의 스펙을 관리하는 데 여념이 없고 교수들은 수치로 평가되는 교수업적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논문편수, 연구비, 강의평가 점수 등으로 자신을 관리한다. 수치로 평가되는 교수 업적은 교수들의 가장 큰 관심 수치인 연봉으로 귀결된다. 대학의 목적에 내용은 없다. 수치만이 있을 뿐이다.

전통적으로 대학 교수들은 수치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들은 특권층이었지만 경제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학문의 자유를 제한 없이 갖는다는 의미에서 특권층이었다. 교수들은 외부의 영향력과 무관한 보편적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적 지식인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그들의 특권에 따르는 책임을 수행해 왔다. 돈 되는 학문, 돈 버는 연구는 그들의 첫째 관심이 아니었다. 사익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 지식을 쓰는 사람이 대학 교수라는 지식인이었다. 사르트르식으로 말한다면, 지식인은 약자를 위해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이다. 수치만이 강조되는 대학은 교수들에게 수치 향상에 도움이 안 되는 연구, 자신과 무관한 일에는 관심을 끊게 한다. 수치화된 대학의 교수들은 자신의 수치 향상을 위해 스스로 길들여져 간다. 수치화된 대학에서 수치에 무관심한 교수인 척 하기가 쉽지 않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