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우 / 사회학과 박사과정

지식을 산업으로 분류하는 것도 모자라 ‘신 성장 동력’이라 말하고, 대학이라는 말과 경쟁력이라는 말이 붙어 다니는 현실이 어느덧 ‘정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대학 주식회사>는 ‘신 성장 동력으로써의 지식산업’, ‘대학 경쟁력’이라는 말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에게 스스로 정상적인 인간인지를 되물으라고 요구한다. 이 책의 서술 방식은 크게 공격적이지 않다. 차라리 19세기부터 현재까지 미국 대학-기업 관계의 역사를 차분하게 나름대로 균형감각을 살려가면서 다룬다. 하지만 서평은 일종의 ‘다시 쓰기’가 아니던가. 때론 거칠고 단순하게 저자의 의중을 짐작하고 다시 서술하는 것이 원문이 던지는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에밀 뒤르켐에 따르면 사적 재산권, 특히 어떤 영리를 추구하는 수단으로써의 재산권은 ‘배타적 접근권’과 ‘재산권 대상을 공동체로부터 철회할 권리’를 그 특징으로 한다. 내가 소유한 것을 남들이 쓰지 못하게 할 권리, 사회로부터 재산권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는 권리가 사적 재산권의 핵심이다. 그러나 지식은 사회적으로 축적되는 것이며, 오직 사회적인 방식으로만 축적되는 것이다. 어떤 생명공학 기술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특정 동식물에 대한 용례가 사회적으로 쌓여 왔고, 기술의 유용성에 대한 사회적 상상이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지적 재산권의 임의적 법규정을 배제한다면, 생명공학 기술에 대한 지적 재산권 보유자는 그가 얻는 이익의 수억 배를 인류와 사회에 빚지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식의 속성은 사적 재산권의 원리와 전면적으로 대치된다. 결국 ‘지적 재산권’이란 말이 통용되는 순간 둘 중 하나는 살아남을 수 없다. 교육에서 경쟁을 강조하는 것이 결국 ‘지식’과 ‘교육’을 희생시켜 ‘돈벌이 추구’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경쟁’이라는 것이 끝내 교육 주체들을 분할하고 개체화시키는 것을 내적 속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식이 오직 사회적으로 축적된다는 것은 현재의 특정한 ‘지식 형태’가 구성되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새로운 지식은 근본적으로 최종 조합 순간의 결과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오랜 기간 누적되어 왔던 사회적 집합 행위의 결과다. 대학과 같은 교육 연구의 공간이 만들어져서 때로는 실용성이 없는 듯 보이는 지식의 창출과 확산을 보호·육성하려 했던 것은 일말이나마 지식 축적의 ‘장기적 성격’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재산’과 ‘이윤’의 구체적 성격을 규정하는 현대적 제도들은 재산을 기초로 한 이윤창출의 ‘단기성’을 강요한다. 이러한 현대적 제도에서는 기업 실적을 공시하는 1분기마다 특정한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다. 나아가 1분 1초라도 재산 가치가 하락하거나 손실이 발생하면 일순간에 나쁜 평판과 그만큼의 추가 손실을 겪도록 돼 있다. 때문에 ‘대학’과 ‘이윤’은 전면적으로 대치된다. 둘을 통째로 묶어 놓으면 결국 둘 중 하나는 죽는다. 세대를 물려가며 던져져야 할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해 새로이 답변하려는 노력들이 ‘현재화된 미래 이윤의 흐름’앞에 무의미하게 되는 순간은 곧 교육과 연구의 기둥이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기업은 이윤 추구를 존재 이유로 삼는다. 그런 기업이 대학의 머리 위에 앉아 대학 정책을 운운하고, ‘경쟁의 강화’, ‘경쟁력 제고’ 같은 것을 교육 개혁의 철학인 양 내세우는 현실은 말 그대로 ‘부조리’이며, 지속될 수 없는 시한폭탄이다. 카이스트의 현실을 보건데, 우리 사회에서 이 폭탄의 폭발 시한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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