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9.4 금 14:15
기획문화
원 소스 - 멀티 유즈라는 판타지최성민 /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유하은 편집위원  |  joyskyk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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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호]
승인 2011.04.20  18: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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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원제 : 노르웨이의 숲)를 영화화한 <상실의 시대> (감독:트란 안 홍, 2011)

 

    물론 우리가 흔히 접하는 ‘원 소스 멀티 유즈’는 사실 이런 유희 수준의 활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원작을 새로운 장르, 매체 환경으로 변형시키거나 재가공하여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 소스 멀티 유즈’라는 표현 자체는 비교적 근래 디지털 환경과 더불어 등장했다. 베냐민이 말했던 ‘기술 복제의 시대’가 ‘원 소스’의 복제 활용을 활발하게 부추긴 영향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존의 작품을 다른 매체에서 활용한다는 발상은 아날로그 시절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판소리 <춘향가>는 개화기 무렵 이후 딱지본으로, 연극으로, 영화로, 창극으로, 라디오 드라마로, TV 드라마로, 발레로, 마당놀이로, 만화로, 애니메이션으로 끊임없이 재가공돼 왔다. 특히 한국 영화의 역사에서 최초의 토키 영화, 최초의 칼라 영화, 최초의 칼라 시네마스코프 영화는 모두 춘향의 이야기를 영상화한 작품들이었다. 춘향의 이야기가 이렇게 다양한 장르와 매체 환경으로 변형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야기 자체의 매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수용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이야기이고 제작자에게 가장 안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서양의 경우에도 오페라나 영화와 같은 새로운 예술 장르가 등장하던 초창기 때마다 비교적 인기 있던 기존의 서사를 재가공하여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공식처럼 됐던 것은, 대중들에게 있어서 익숙함이 상업적 보증 효과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 이태준은 <춘향전의 맛>(1940)이라는 글에서 춘향전을 책으로, 영화로, 연극으로, 소리로 접할 수 있지만, 소리만큼 깊은 맛을 주는 것은 없다고 적어 놓았다. 춘향의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 ‘소리’로 불려질 때 제맛이라면서, 판소리 ‘춘향가’를 그 어떤 춘향 이야기보다 우월한 것으로 꼽은 것이다. ‘원 소스 멀티 유즈’의 사례에도 불구하고 원작으로써의 ‘원 소스’의 가치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그것은 멀티 유즈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멀티 유즈들에 비해서 익숙하고 오래된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장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예술 활동이 ‘원 소스’의 창안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작품에서 콘텐츠로, 상업적 재가공의 현실

    지금 현재, 문화 예술조차도 산업화되고 상업화된 시스템 속에서 ‘원 소스 멀티 유즈’는 ‘저비용 고효율’이라는 경제 논리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가령 새로운 영화를 기획하거나 제작해야 하는 이들은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를 양성해 그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활용하려 하기 보다는 ‘멀티 유즈’에 활용할 ‘원 소스’를 기존의 연극에서, 만화에서, 소설에서 발견하는 방법을 택하곤 한다. 그것이 훨씬 간편하고 효율적이고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한때 전 세계의 가장 창의적인 이야기꾼들이 몰려들던 할리우드에서도 다른 나라 영화 시나리오의 리메이크작을 만들거나 기존 영화의 속편을 거듭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안전하고 편리한 선택을 선호하고 있다. 가끔 새로운 ‘원 소스’를 만들어내려고 할 때에도 무엇보다 ‘멀티 유즈’를 염두에 두고 고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한 소스가 되도록 강요받는다.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이행이 일어나나 싶더니, 어느 순간 ‘작품에서 콘텐츠로’의 변화가 현실이 되었다. 창작자의 예술혼이 담긴 ‘작품’도 아니고, 수용자의 창의적 해석을 유도하는 ‘텍스트’도 아니고, 이제 서사 예술은 상업적 재가공의 대상이 될 한낱 ‘콘텐츠’로 규정될 뿐이다.

    신의 영역에 견줄 수 있는 창조 능력을 발휘해야 할 예술 창작자들은 ‘원 소스’ 콘텐츠라는 원재료를 납품해야 하는 하청 생산자로 전락해 버렸다. ‘원 소스 멀티 유즈’ 전략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존중받고 지원받아야 할 ‘원 소스’의 창작자들은 불합리한 ‘저작권 양도 계약서’를 통해 ‘멀티 유즈’의 결실과는 무관한 존재처럼 내몰려 버렸다. 내가 그린 만화가 영화로, 게임으로, 아이들 장난감으로 변형될 때마다 누군가는 큰 수익을 올리지만, 정작 창작자에게는 별다른 경제적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생산 기지 역할에 충실했지만 가공 생산과 유통을 담당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국가들의 처지는 지금 가난한 만화가에게, 시나리오 작가에게, 소설가에게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들의 손에는 여전히 펜이, 작은 노트북이 들려 있지만, 이제 그것만으로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고 말았다.

      ‘디시인사이드’라는 인터넷 사이트에는 다양함이라는 말만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인터넷 문화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이 녹아있다. ‘디시인사이드’가 주목을 받게 된 계기 가운데에는 합성 패러디 이미지들이 한 몫을 했다. 대나무에 매달린 귀여운 강아지는 ‘개죽이’란 이름으로 세계 각지의 관광 명소에 합성되어 등장했고,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2002) 속 장승업 역할을 맡았던 배우 최민식은 합성 이미지를 통해 국회 의사당 안에 술병을 든 채 등장했다. 하나의 원본 이미지를 수많은 다른 이미지에 합성한 결과물들이었다. 다 똑같은 이미지이지만, 합성된 배경 이미지에 따라 그것은 관습으로부터의 일탈이자 상식에 대한 도발이 될 수 있었다. 이는 ‘갤러’라 불리는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가능한 것이었고, 이들의 참여에는 별다른 대가도 주어지지 않았다. 오로지 상승하는 조회수를 보고 기뻐하거나, 혹은 가끔 운이 좋으면 ‘대문’이라 불리는 메인 화면 히트 갤러리에 옮겨지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필수요소의 합성을 통한 ‘원 소스 멀티 유즈’는 그저 유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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