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 /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대우교수

   양자역학이 물리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흥미를 끄는 주된 이유는 아마 그것이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해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러한 기대는 이내 실망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이론의 복잡한 수학적 구조는 차치하고라도 그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불분명하며, 간혹 내던져진 단편적인 발언들도 논쟁의 대상이라 결국 확실한 것은 없다. ‘양자역학에서 확실한 것이 있다면 오직 이론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뿐’이라는 말이 있다. 과장된 측면도 없지 않지만, 이는 이론에 대한 어떤 합의된 이해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이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높은 수준의 수학과 실험 기술을 동원한다 해도 그것이 인간의 언어를 빌어 표현된 인간 활동의 산물인 한에서는 시공을 넘어 다른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양자역학이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 과정도 어떤 내적 논리가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전개되고 있으며, 이는 복잡한 수식 없이도 표현 가능하다. 그렇다고 양자역학이 어떤 단일한 세계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출발부터 양자역학의 의미를 둘러싼 논쟁은 있어왔으며, 아인슈타인이나 슈뢰딩거와 같은 뛰어난 물리학자들마저 비주류로 내몰린 것을 상기한다면 여기에도 다양한 견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 사실이나 증거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해석’의 문제가 개입하게 된다. 마치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놓고 해석상의 논쟁이 벌어지듯, 양자역학을 놓고도 해석자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양자역학을 둘러싼 해석

   양자역학을 처음 만들어 나가며 그 해석의 방향마저 결정지은 학자로 닐스 보어를 빼놓을 수 없다. 보어는 이론의 수학적 형식과 이를 뒷받침하는 실험만큼이나 이론을 만들어가는 인간의 인식 구조와 개념의 한계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물리학의 과제는 자연 세계가 어떠하다는 것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자연 세계에 대해 무엇을 알고 말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인식이 불가피하게 개입하게 된다. 1926년 슈뢰딩거가 파동역학을 들고 나오면서 양자 세계에 대한 객관적 그림을 회복하려 했을 때도 보어는 회의적이었다. 슈뢰딩거는 원자 안에서 전자가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알고싶어 했다. 양자론에 따르면 전자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불연속적으로 옮겨가는데, 슈뢰딩거는 이러한 양자 도약이 갑자기 일어나는지, 아니면 시간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지를 반문한다. 그렇기에 양자 도약 개념에는 모순이 있으며, 자신의 파동역학에 따라 전자를 입자가 아닌 연속적인 파동으로 기술하는 순간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다. 슈뢰딩거는 이로써 고전적인 그림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전 체계의 정신”을 구하려 했다.

   이에 대한 보어의 답은 인간의 인식과 지금까지의 물리 개념에 관한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슈뢰딩거가 지적한 모순은 양자 도약이 없음을 증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양자 도약이라는 현상을 ‘표상할 수 없음’을 증명할 뿐이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물리 이론과 현상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보어는 특히 시공간이나 인과율과 같은 고전적인 개념이 양자 세계에서 더이상 보편타당한 개념이 아님에 주목하여 이를 ‘상보성’이라 불렀다. 슈뢰딩거가 원했던 것처럼 입자를 시공간 위에서 기술하게 되면 더 이상 인과율이 성립하지 않고, 반대로 인과율이 엄밀하게 적용되는 한에서는 시공간적 기술이 깨지게 된다. 두 가지 기술 방식은 배타적이지만 서로를 보완해 양자 세계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이 궁극적으로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가, 아니면 무작위적 과정의 산물인가를 물을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그러한 일상적인 개념으로 양자 현상을 기술하는 데 한계는 없는가, 있다면 그 정확한 경계는 어디까지인가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정량적인 해답을 주었다. 그렇다면, 물리학에 더 이상 신의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유한한 인간 존재의 경험을 통해 인식의 확장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무한한 세계를 향한 도정

보어의 인식론적 해석을 체계적으로 반박하며 대안을 제시한 이는 데이비드 봄이다. 봄은 보어만큼 잘 알려진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한때 아인슈타인의 후계자로 지목받았던 주목할 만한 물리학자다. 봄의 관점은 인간 인식의 한계가 양자 세계의 한계라는 보어의 관점에 반대하며 출발한다. 아직까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양자 현상을 더 자세히 결정해 줄 ‘숨은 변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숨은 변수 수준에서 보면 양자 현상은 여전히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다. 동시에 숨은 변수는 마구잡이로 요동할 수 있다. 고전적인 의미의 인과율이 양자론에서 깨졌던 것처럼 양자론의 비결정론적 요소도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결정되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인과율과 우연은 동전의 양면처럼 층위를 두고 반복된다. 따라서 세계가 절대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또한 그러한 반복이 고정된 패턴으로 나타난다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우리는 아래가 트인 무한히 깊은 세계를 향한 도정에 있으며 자연은 그 과정에서 끊임없는 새로움을 준비한다. 자연은 가능한 입자의 배치나 힘의 분포와 같은 양적인 측면에서만 무한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패턴이 새로운 방식을 깰 수 있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무한하다.

   이러한 봄의 언명이 너무 멀리 간 듯 하거나 ‘신비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봄이 물리 이론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봄은 자연이 활동할 수 있는 방식은 무한하며 이론은 이러한 무한한 과정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라 여긴다. 20세기에는 바로 양자역학이 그런 일을 한 것이다. 많은 물리학자들은 봄의 관점이 구체적인 실험 증거가 없는 가설이자 사변에 머문 이야기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20세기를 지배한 보어의 해석도 하나의 해석일 뿐 최종 결론은 아니다. 따라서 봄의 해석도 자연을 보는 새로운 관점으로 존중돼야 마땅할 것이다. 새로운 물리학, 더 나아가 새로운 자연 탐구 방식은 세계를 열린 관점에서 보는 다양한 시각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나오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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