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민호 / 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

짧은 한 권의 책에 (세계)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기획이다. 역사가 과거에 대한 기록이라면, 그 과거란 획정될 수 없는 무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수많은 책들을 접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저자가 취하고 있는 독특한 관점이다. 이러한 책은 특수한 관점을 매개로 과거의 사건들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이 책의 저자인 사이토 다카시는 (세계)역사를 관통하는 다섯 가지 힘을 제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 인간은 역사적 소여를 준거로 언어를 습득하고 소통하며, 그 안에서 지식을 얻고, 행위의 근거가 되는 사회적 합리성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특수한 문화적 요소들의 전승을 통해 역사적 존재가 된다. 이에 반해 사물 혹은 사건 그 자체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 사물 혹은 사건은 그냥 존재하는 것일 뿐이지 스스로는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역사적 존재인 인간의 의미망 속에 포착됨으로써, 인간에게 인식되고 언어를 부여받음으로써 ‘역사화’ 된다. 때문에 우리는 역사(라고 불리는 것)와 마주할 때 그것을 소환한 주체의 의도와 입장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때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 의도와 입장의 이면에 직접적인 배후와 음모 혹은 치밀한 이데올로기적 공작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책에서 저자가 왜 (세계)역사를 다섯 가지 키워드로 엮어 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저자는 그 키워드를 고도의 정치적 계산 위에 배치시키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이 다섯 가지의 키워드들은 비일관적이며, 우연적인 것처럼 보인다(어떤 일관성을 찾아내기에 이 책은 너무 허술하다!). 사실 이 책은 ‘전문 학술서가 아니라, 흔한 하나의 교양서일 뿐’이라는 말로 이런 비판을 회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그리 대단한 변명이 되지 못한다.

교양이라는 것 자체가 근대 부르주아 사회가 만들어낸 정치적 범주이기 때문이다. 교양 있는 사람은 시민(문명)화되고(civilized), 문화화되고(cultured 혹은 cultivated), 교육 받은(educated) 사람이다.  교양은 시민이 당연히 알아야 하는 상식이며, 상식(common sense)은 시민들의 공통 감각(common sense)을 형성함으로써 그들에게 각인된다. 교양이나 상식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지평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이 시중에 널려 있는 ‘통사류의 세계사 책’과는 ‘차원이 다른’ 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역사 기술이나 대안적 역사 인식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기 보다 보편화된 편견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들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판했던 역사기술의 지점들을 반복하고 있다. 이 책은 세계사라는 이름으로(일본사가 언급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서구의 역사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있으며, 제국주의를 남성들의 정복 욕망으로 환원하고 있다. 또한 “인공적” 사회주의에 대한 “자연 발생적” 자본주의의 궁극적 승리가 나아가, “자본주의의 미래가 인류 전체의 미래”가 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일관성 없는 관점이나 치밀하게 계산되지 않은 역사적 사건들의 나열은 마치 가치 개입이 배제된 역사 기술인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그것은 교양서의 보편성을 가능케 하는 비정치성과 연루되어 있다. 그러나 서구의 역사가 세계의 역사라 가정하고, 남/여의 성 역할과 특성을 고정시키고, 대체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것만큼 ‘정치적인’ 것이 또 있을까.

이러한 역사 교양서와 마주할 때 우리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요구되는 교양으로서의 역사, 그 역사 속에서 무엇이 계승되고, 무엇이 반복되고, 그리고 무엇이 망각되고 있는지를 분명히 물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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