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희 / 연세대 강사

슬라보예 지젝의 첫 영문 저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1989년에 출간되었다. 1989년은 대단히 상징적인 해이다. 그 해 봄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인민들!―를 탱크로 깔아뭉갰고 가을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으며,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잇달아 붕괴하더니 마침내 소련의 해체로 끝장을 보고 말았다. 오늘날 1989년은 ‘사회주의의 공식적 사망년도’로 통용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현실 사회주의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리라는 게 모두에게 분명해 보였던 바로 그 무렵, 놀랍게도 지젝은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을 준비하는 책을 내놓으며 두더지처럼, 만장일치의 합의를 무너트릴 땅굴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놀라운 데뷔작 이후 상재된 일군의 초기 저작들은 지젝을 단박에 서구 인문학계의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지젝이 이때부터 구가해온 성공 가도에는 아주 기이한 면이 있다. 그것은 지난 20년 간 소위 대세라고 여겨지던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최종적 승리, “역사의 종언”,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냉소적 회의주의 등등의 주류적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며 성취된 것이니 말이다.

지젝의 책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된 1995년, 이 싱싱하고 매력적인 이론가가 방금 우리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변증법적 유물론’의 혁신적 계승자란 생각은 당시 누구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지금도 지젝을 대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지젝의 ‘레닌론’은 그 시금석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2인 3각’

1989년 이래로 좌파와 우파가 공유한 불문율 중 하나는 ‘마르크스는 괜찮아. 그러나 레닌은 안 돼!’였다. 지젝이 이 불문율에 제기하는 반론은 우선 이런 것이다. “레닌에 관해 말하지 않으려면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어라!” 어째서? 레닌이라는 이름은 마르크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코뮤니즘이라는 잠재력의 현동화(actualization)를 표상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교양적 독자가 아니라 실천적 마르크스주의자,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였다. 실천(praxis)이라는 끈에 의해, 마르크스와 레닌은 ‘2인 3각’ 달리기에서처럼 하나가 된다.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말에는 언제나 주의가 필요하다. 경기를 해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2인 3각’은 둘이 하나가 되는 조화의 경험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기본적인 느낌은 ‘마음대로 되지 않음’과 ‘뒤뚱거림’이다.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란 표현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도 바로 그 대목이다. 살아있음의 구체적 체험들―예컨대 사랑―이 대개 그러하듯, 그것은 이질적인 타자와의 마찰, 부조화, 마치 장애물을 안고 뛰는 듯한 불편함을 선사한다. 물론 2인 3각의 묘미는 바로 그런 상호 타자성을 견디고 넘어설 때, 나의 다리도 너의 다리도 아닌 저 ‘세 번째의 다리’가 마치 내 다리인 것처럼, 보다 정확히 말해 내가 그 ‘타자의 다리’에 붙은 신체인 것처럼 움직일 때의 향락(juissance)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이라는 2인 3각에서 세 번째 다리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코뮤니즘’이다. 이 세 번째 다리―음탕한 농담에서 언제나 남근(phallus)을 가리키는―가 포퓰리즘적 지도자의 형상을 띠거나 파시즘적인 ‘우리’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 아니,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러한 위험을 과감히 가로질러가야 한다. 레닌의 위대함은 그가 (나중에 스탈린주의라 불리게 될) 그런 위험과 끝까지 투쟁하며 혁명적 실천을 거듭했다는 점에 있지, 애초 그런 위험을 멀리한 신중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1949~)

‘레닌을 반복하자’는 지젝의 말

지젝이 강조하는 레닌은 1914년의 재난으로부터 1917년의 혁명에 이르기까지의 ‘불가해한 레닌’이다. 1914년 제2인터내셔널이 1차 대전을 용인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제까지의 사회주의 이념은 깡그리 무너져버렸다. 당시 레닌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엉뚱하게도 스위스 베른의 도서관에 처박혀 헤겔의 <논리학>을 정독했다. 지젝은 레닌이 헤겔 <논리학> 독해에서 통찰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큰 타자(Autre)는 없다’는 라캉의 명제와 연결시킨다. 그는 레닌이 그 큰 타자의 ‘빈자리’에서 허무가 아니라 주체의 자유를 실현할 장(場)을 발견하는, 혹은 바로 그 간극(빈자리)을 주체적으로 떠안는 '실재(the Real)의 행위'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지젝이 거듭 강조하는 것은 레닌의 바로 이 행위, 혁명에 대한 어떠한 전제나 보장도 사라진 큰 타자의 공백을 주체적으로 떠안는 몸짓(gesture)이다. 그것은 무조건적 의지주의가 아니며 레닌이 책에서 읽은 것을 현실에 과감하게 적용했다는 뜻도 물론 아니다. 마르크스라는 미완의 텍스트가 레닌이라는 ‘사라지는 매개자’를 통해 미완결의 현실이라는 텍스트와 조우한 이 사건의 변증법적 핵심은 사랑에 관한 라캉의 통찰―사랑은 두 개의 결핍이 만나 발생시키는 잉여이다―의 정치적 버전이라 할 만하다. 또한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자신의 간극을 열어 서로에게로 침투하는 사건이다. ‘역사의 종말’이라고 일컬어지는 후기 자본주의적 봉쇄와 교착상태 속에서 우리가 지금도 그런 주체와 객체의 동시적 ‘열림’을 경험할 수 있을까. 지젝은 이 물음을 화두삼아 1989년 이래로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적 상징계로 꽉 닫혀버린 우리시대에 꾸준히 ‘구멍’을 내왔고, 독자들은 그가 뚫는 구멍들을 해방의 가능성을 향한 ‘열림’으로 체험해왔다. 이것이 지젝의 기묘한 ‘반시대적’ 성공의 이유가 아닐까.

포퓰리즘을 넘어서

오늘날 파시즘의 유사 버전으로 도처에서 자라나고 있는 좌파적, 우파적 포퓰리즘들은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형식으로 봉합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간극의 실재를 감지하기 시작했다는 표지이다. 비록 그것이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지도자와 대중들의 무분별한 요구가 직접적으로 결합하는 형태로 나타기는 하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치안이나 행정서비스로 환원되지 않는 본래적 ‘정치’가 여전히 가능하다는 긍정적 표식이 들어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포퓰리즘을 돌출적인 악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 구성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라클라우에 동의한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주체(대중)가 자신의 수치와 대면해야 할 사회적 적대의 심연을 사이비 적대―이른바 좌빨과 촛불좀비에서부터, 열폭하는 찌질이와 쥐박이에 이르는 온갖 혐오의 형상들―를 통해 회피하고 기성의 욕망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요구만을 계속하는 ‘증상’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비판받아야 할 무책임과 비진리, 그리고 비주체의 정치이다. 포퓰리즘의 문제는 그것이 인민의 열망과 불만을 정치적 비전으로 발언하지 못하고 번역하지 못한 (정치 엘리트만이 아니라) 인민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기념비라는 데 있다.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이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결국 이 주체의 간극과 그것을 떠안는 ‘행위’의 문제로 집약된다. 포퓰리즘 정치에서 대중은 여전히 지도자와 구분되는 객체(대상)의 자리에 머문다. 거기에는 (상상적, 상징적) 자기를 부정할 때 비로소 생성되는 ‘실재의 주체’로서의 대중 자신이 결여돼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에 대한 라클라우의 담론에도 이 ‘실체이자 주체’로 도약하는 대중의 ‘행위’, 한마디로 ‘레닌적 제스처’가 결여돼 있다.

포퓰리즘을 넘어서는 레닌적 ‘진리의 정치학’은 진리를 소유한 자―그는 언제나 물화된 진리의 소유물이 될 수밖에 없다―의 독단적 통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타자를 향한 우리 자신의 물음(問)이 열리는 구멍(口)에 뛰어들어 자신을 새로운 역사적 형세(constellation)를 여는 문(門)으로 변화시키는, 실체이자 주체인 진리가 되어가는, 우리 삶의 과정 자체이다. 지젝은 이를 “생성 중인 레닌”이라 불렀다. 우리가 지젝의 텍스트와 ‘2인 3각’ 달리기를 해야 할 운동장도 그 주체적 생성의 시공간으로서의 ‘삶-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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