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혹은 사랑이라는 단어는 주어진 젠더를 위반하지 않는 이성애자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일까. 이성애중심의 가족주의를 전제로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그들’을 잘 알거나 하나도 모른다. 최근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동성애를 통해 경계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없는’ 존재였던 성 소수자의 삶과 그것이 재현되는 방식, 그리고 오늘날 차이를 넘어서는 성정치의 가능성에 대해서 고민해본다.

●대담 일시 및 장소: 2010. 08. 24, 17:00
                       이대 후문 ‘오라토리오’

●대담자 
박이은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성차와 성(젠더와 섹슈얼리티), 그리고 그것이 가부장제·자본주의와 맺는 관계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하고 듣고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나영정: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연구원, 성정치 의제의 ‘지역화’에 관해 고민하고 있다.

 

 

 

 

 

 

 

 

 

 

 

 

 

 

 

 

 

‘착하고 멋진 내 친구 게이’로 표현되는 최근 대중문화 속 ‘게이 캐릭터’의 홍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특히 <인생은 아름다워>(연출 정을영, 극본 김수현, SBS)를 통해 드라마에서도 ‘멋진 게이’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요.
나영정 십여년의 사회운동보다 한 편의 드라마가 주는 파급력이 크죠. 일단 어떻게 그려졌든, 공중파 가족드라마에서 성 소수자 문제에 대해 말한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으로 봐요. <인생은 아름다워>의 묘사가 나름대로 굉장히 사실적이기도 하고요. 한편으로 김수현 작가 특유의 가부장제 재현에 필요한 하나의 양념으로써, 그러니까 대가족의 일원들이 튀는 한 명(게이)조차 버리지 않기 위해 어떤 논리와 감정을 동원하는지 잘 보여주기 위해 동성애를 이용했다고 보기도 해요. 둘 다 모두 일리가 있는 이야기지요. 어쨌든 드라마에 나오는 두 게이 모두 전문직이고 몸짱에다 점잖고 전혀 사회에 위협적이지 않은 캐릭터이기 때문에,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이 게이에 대한 환상을 갖고 어떤 대표성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불편하기는 하죠. 하지만 미디어, 드라마가 갖는 한계를 생각해 볼 때 유독 게이의 상징을 드러내기 위해 그런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박이은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런 드라마가 나왔다는 사실에 반가웠을 거예요. ‘커피프린스 1호점’이나 ‘왕의 남자’ 등에서는 게이코드가 살짝 등장하면서 센세이셔널한 것으로 주목받다가 결국 이성애로 봉합되죠. 대부분이 그렇게 소비되어지는 동성애로만 다뤄졌다면, 이 드라마는 그 지점은 넘어선 거예요. 하지만 결국 동성애를 주변화하는 장치들 안에서 이야기한다는 한계가 있죠. 가부장제와 가족주의라는 기존의 제도를 미화하고 그 속에 동성애적 존재나 사랑, 생활방식을 끌어들이는 방식이니까요. 이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건 뭘까, 또한 누구에게 말을 거는 걸까 궁금하기도 해요. 이성애자들에게 “사실 동성애자들도 꽤나 멀쩡한 애들이고 너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이 구조 자체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전자라고 봐요. 일단은 기존의 제도 안에 ‘멀쩡한 애들’은 흡수 가능하지 않겠나, 그런 거죠. 기존 제도권의 수정주의 혹은 개량주의적 확장 같은 것일까요? 하지만 이렇게 게이커플이 대놓고 공중파에서 재현된 적도 없었고, 이들이 가족 안에서 어떤 아픔을 겪는지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성 소수자 공동체에서는 이 드라마가 반가운 일이에요. 이후에 어떤 드라마나 영화가 나올 것이냐, 그것이 관건이겠죠. 사실 이 소재를 ‘이용’한 건 맞죠. 김수현 작가가 정치적 올바름에 관련해 이 문제를 다룬 건 아니고, 중산층의 아량이랄까. ‘이제 이런 정도의 수용은 필요하지 않아?’와 같은.
나영정 현대 가족이 처한 여러 위험 중의 하나로 동성애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가족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박이은실 처첩의 문제, 이혼, 이성애 부부의 갈등을 잇는 의제로써. 하지만 실제 성 소수자들이 이 드라마의 재현을 보고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잘 그려낸 거죠.

한편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게이들 말고, 실제로 존재하는 돈도 없고 잘생기지도 않은 게이들. 그러니까 ‘내 친구가 될 수 없는’ 게이들은 아예 그려지지 않고 있어요.
나영정 호모포비아는 특정 계급에 대한 포비아와 굉장히 맞아떨어지는 데가 있어요. 돈 없는 동성애자들이 너무 많죠. 그런데 최근 정말 절감하는 것은 사회에 만연한 하층민에 대한 혐오, 그리고 하층민임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에 대한 혐오예요. 거기다 게이이기까지 하면 더욱 심각해지는거죠. 돈도 없고 패션도 모르고 못생기고 뚱뚱하고 늙은 사람, 이런 게이에 대해선 동정조차 없겠죠. 계급의 문제라고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외모와 성향 같은 것들이 존재의 문제가 된 시대에 못생기고 돈도 없는 게이를 혐오하는 것과, 깨끗하고 잘생기고 돈 많고, 살림도 잘하고 수다 잘 떨고 여자를 잘 이해해주는 게이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둘 다 어떤 은유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박이은실 포지션에 따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질 수 있죠. 이성애 여성들이 레즈비언을 보는 것과, 게이를 보는 것이 다르고. 이성애 남성들이 레즈비언을 보는 것과 게이를 보는 것이 다르고. 어느 이성애 여성은 레즈비언을 굉장히 혐오하지만 게이는 또 좋은 친구로 받아들이고. 혐오에 관한 것 또한 중층적이겠죠. 계급에 대한 혐오, 외모에 대한 혐오, 자기 환상을 배반하는 것에 대한 혐오 등등. 욕망에 관해서라면, 어떤 존재가 자기의 내밀한 욕망을 드러내려 하거나 해치려 하기 때문에 혐오할 수도 있고. 누구도 지저분하거나 쪽방에 사는 걸 욕망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 게이는 안 통하는 거죠. 좋은 오피스텔에 사는 의사나 그보다 더 빵빵한 경제력을 갖고 있는 사진작가와 같은 이 사회 1%의 상류층은 모두가 욕망할 수 있는 대상인거죠. 우리 모두가 욕망하는 코드와 게이 코드가 결합했기 때문에 잘 먹혀든 거지.

남성 동성애자들, 게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까지 발전되었는데 레즈비언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쯤 가능할까요? 게이는 이제 ‘친구’가 되었는데.
박이은실
그런 점에서 김수현 작가의 작품이 특별히 문제적이죠. 이 가부장제나 남성중심성을 깨지 못하면 레즈비언 이야기는 포르노로밖에 머물지 못해요. 레즈비언 커플이 나오고 그것이 엄마와 딸의 갈등이 된다면 정말 핍진한 뭔가가 나왔을 텐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변화하는 기본 구조 자체는 결국 건드리지 않아요. 이성애 남성중심성, 그것과 곧바로 연결되는 가부장제, 이 구조 자체가 깨지지 않으면 레즈비언의 성애는 언제까지나 포르노적으로 소비될 수 밖에 없죠.
나영정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은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고 실제로 정말 남성들이고. 경제위기 이후 탈락하는 남성 가장들 대신 경제를 책임진 여성 가장들의 가족에 대한 집착, 아들에 대한 욕망과 자기동일시, 이런 부분도 드라마에서 잘 보여주죠.
박이은실 기존의 판을 깨려는 사람들이 있고, 판을 깨지는 않지만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판을 깨려는 사람들 덕분에 결과적으로 덕을 보는 사람들은 판 안에 있는 사람들이죠. 깨려고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주변화돼요. 중심화되지 못한 삶을 살면서 싸워온 사람들의 결과물들을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즐기게 되는 것인데……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렇게 조금이라도 변해왔고, 변하겠죠. 하지만 판은 좀 더 깨지고 해체되어야 하고, 힘들더라도 그런 시도는 계속 해야 해요.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중심부로 들어가야 하는, 그러니까 소수자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제도에 순응하는 시민주체가 되어야하는 아이러니도 있을 것 같아요.
나영정 미국에서의 ‘좋은 게이 되기’를 본다면, 그곳에서는 돈을 열심히 벌고 시민주체가 된 게이들이 목소리를 냈고, 민주당에 가입해서 로비도 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요. 그것이 미국의 정치지형이기도 하고. 한국은 맥락이 또 다르죠. 동성혼에 대해서도 사실…… 동성혼, 이게 가능해진다고 해도 결혼해서 물려줄 재산도 없는 사람들이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박이은실 앞으로 국가의 역할은 갈수록 줄어들고 시장, 기업의 역할이 더 커질 텐데 그것이  퀴어 섹슈얼리티라는 이슈와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될 것인가, 궁금하기도 해요. 전망하기는 힘들지만. 
나영정 ‘성정치보다 계급 운동이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성정치를 폐기해야 한다고 보지 않아요. 국가나 사회,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성적 지향의 문제가 더는 사적인 것으로 이야기될 수 없으니까요. 가족제도를 자본이 이용하는 것처럼 소수자의 문제는 경제적 정의의 문제와 융합되지 않고 있어요.

기존 레즈비언-게이 이론으로서의 ‘게이 정치학’과, 그것이 가진 한계를 비판하는 ‘퀴어 정치학’이 구분되는 지점은 어디에 있나요?
나영정 우리나라에서는 1996년 성정치문화제 이후 퀴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는데, 서구에서 유입된 그대로 쓰인 측면이 있어요.
박이은실 게이, 동성애, 이반 이러면 너무 직접적이라 이야기하기 힘드니까, 낯선 용어가 주는 거리감이나 그로 인한 해방감으로 ‘퀴어’란 말이 쓰인 측면도 있고.
나영정 퀴어문화축제의 경우 오히려 예산을 집행하는 공무원들이 ‘퀴어’가 뭔지 잘 몰라서 지원해주기도 해요.(웃음) 성 소수자에 대한 문화적인 번역 혹은 문화적 닉네임이랄까. 퀴어문화축제가 퀴어정치학에 의거한 축제였다면 내용이 좀 달라졌을 텐데. 그 축제의 내용은 기존 ‘게이 정치학’의 내용, 그러니까 성 소수자들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 이런 것이었죠. 서구에서 나왔던 정체성을 분절적으로 인식하는 LGBT(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라는 개념을 넘어서 주류적인 가치와 선을 긋고, 문화적으로도 전복적인 그런 걸 총체적으로 통칭하는 용어가 퀴어인데, 한국에선 그렇게 쓰이지 못한 것 같아요. 퀴어정치학에서 중요한 것은 경계에 대한 것을 문제삼는 것과 성 소수자의 문제를 여타 사회 의제를 재구성하는데 중요한 의제로 연관시키는 것이에요. 이런 정체성의 경계와 ‘타고났음’에 관해 스스로를 설명하는 것에 대해 성 소수자들 내에서도 문제의식이 생겨났고 공유되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특히 이명박 시대에 들면서 성 소수자 운동도 경제적 정의나 민주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었죠. 우경화, 성적 보수주의 이것들과 부딪히면서 자연스럽게 문제의식들이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해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퀴어’ 담론을 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차이를 넘어서는 정치로서 퀴어정치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요?
박이은실
‘다시’는 아닌 것 같아요. 한국사회가 가진 독특함은, 어떤 이야기가 나오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퀴어정치학, 퀴어담론, 혹은 담론의 정치학, 혹은 정체성의 담론, 이러한 문제들은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하고 넘어가고 유행처럼 휙휙 지나가죠. 계급의 문제나 노동의 문제에 성정치가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서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 예리하게 드러내고, 어떻게 접합되는지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성중심성, 가부장제, 자본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성정치는 따로 떼어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 ‘다시’가 아니라 이제 정말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나영정 이 문제는 담론적으로도 여전히 취약하고, 번역 이상의 지평으로 나아가기 굉장히 어렵다는 생각을 해요. 최근에 본 성 소수자 운동은 굉장히 역동적이에요. 퀴어정치학에서 특히 성전환자의 존재와 문제가 드러나면서 젠더의 문제, 젠더 이분법, 생물학적 이분법을 뛰어넘는 도전은 한국에서는 굉장히 도발적이라고 할 만한 거죠. 성별과 신분의 불일치 때문에 극점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해야 하고. 생물학적인 분절을 통해 성역할을 구분하는 완고한 사회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어야 해요.  

  정리 박민정 편집위원 dentata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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