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한 / 서강정치철학연구회 연구원

 이 책에는 ‘허무 개그’가 있다. 세계적인 사상가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엄숙하게 질문한다. “민주주의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대답은 한결같다. “벌써 죽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서설에 불과하니 허탈한 웃음을 참지 못하면 곧 낭패를 본다. 그 다음 질문이 남아 있다. “민주주의는 (진정) 죽었습니까?” 이제 사상가들은 각자 준비해온 날카로운 개념의 칼로 사체를 부검하기 시작하는데, 제각각인 그 절차와 결과가 모두 엽기적이어서 정색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민주주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먼저 장-뤽 낭시는 이놈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소리친다. “민주주의가 사실상 지난 150년간 자신의 지평으로서 발생시키고 짊어졌던 진짜 이름은 코뮤니즘”이며, 그것은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 사회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무한히 자신을 재발명하고 재창조하는 인류의 이념이다. 하지만 그 반대쪽에서 작업하던 조르조 아감벤은, 이놈은 날 때부터 죽어 있었는데 여태 살아있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라고 나직이 중얼거린다. 이런 오해는 “서구 정치사에 초래된 결론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오류 중 하나”다. 근대 민주주의는 태생부터 주권권력과 절합되어 있기 때문에, 적나라한 생명의 위험에 노출된 벌거벗은 생명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대립 가운데, 자크 랑시에르는 진짜 민주주의를 살려내야 한다고 진지하게 요청한다. “정치적 투쟁은 단어들을 전유하기 위한 투쟁”이므로, 민주주의를 죽이는 오용과 조롱에 맞서서 “인민의 권력, 권력을 행사할 어떤 특수한 자격도 갖지 않은 자들의 권력을 뜻하는” 진짜 민주주의를 살려야 한다. 이는 평등이라는 전제를 실천으로 입증할 때 가능하다. 여기에 크리스틴 로스도 한마디 거든다. 서구에서 민주주의는 “극소수 사람들만의 통치, 그리고 말하자면 인민 없는 통치만을 허용하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계급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지만, 그것을 적들에게 내줄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공통 관심사를 실현할 행동양식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재창조해야 한다.

다니엘 벤사이드 역시 랑시에르 편에 가깝게 서 있지만, 그런 식으로는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없다고 반박한다. “민주주의를 혁명화하는 과제”는 의회민주주의나 사적 소유 비판가 더불어 평등과 시민권을 확장시키는 것이고, 이렇게 세상과 ‘불화’하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한에서 민주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으며, 여기에 필수적인 것이 제도(특히 정당)에 관한 사유다. 오늘날 대의제 비판은 정당에 대한 거부로 나아가고 있지만, 민주주의의 죽음을 정당 탓으로 돌려 ‘정당의 매개를 제거하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조직결정론이다. 레닌이 보여줬듯이 “계급관계에 의한 정치적 결정은 정당들의 투쟁을 통해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죽은 시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당-형태를 비판한다는 점에서는 알랭 바디우도 랑시에르와 유사하지만, 그는 죽은 민주주의의 시체를 버리자고 엄격하게 제안한다.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제쳐두고 민주주의자가 되지 않음으로써 ‘모든 이’에게 정말 나쁘게 보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하찮은 향락을 추구하는 “욕망의 민주주의”이며, 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즐겨라’라는 격언 아래 머저리 짓으로 시간을 탕진하는 일이다. 이는 자본-의회주의의 관점에서 민주주의적 평등이 일반적 등가성을 구현하는 화폐 원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런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것이 공산주의다. 공산주의자가 되는 한에서 민주주의는 능동적 인민이 국가와 법의 소멸을 조직하는 과정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

바디우의 제안을 이어받아 슬라보예 지젝은 더 과감하게 민주주의에 대한 강박을 떨쳐버리고 ‘신의 폭력’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정치적 해방운동을 억압하거나 거부하는 논변이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는 아이티혁명 이후 아리스티드 정권에 대해 인권을 무시하는 독재자라고 비난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티드 정권이 용인한 것은 부도덕한 반민주주의가 아니라 신의 폭력이다. 발터 벤야민이 말한 신의 폭력은 “대중이 절박하게 행사하는 폭력적인 자기 방어”이며, 수세기에 걸쳐 자행된 지배자들의 폭력과 착취에 대한 민중의 응답이다. 이런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 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 지젝은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이며, 민주주의에 새겨진 계급적 편향을 인식하고 그 정치 공간의 규칙 자체를 바꾸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처럼 좌파는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을 알아야 한다.

이상이 모두 철학자들의 부검 결과라면, 이 자리에 유일한 정치학자로 초빙된 웬디 브라운은 왜 민주주의가 죽었는지를 가장 깔끔하게 해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해 국민국가의 주권이 쇠퇴하여 인민의 존재 조건이 파괴되고, 자본의 권력이 정치를 지배함으로써 인민이 권력에 접근하여 민주적으로 통치할 기회를 완전히 제거했으므로 ‘인민의 통치’라는 민주주의는 아무 내용 없는 텅빈 기표가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민주주의의 시신을 앞에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히 나는 지금 잘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명쾌한 분석과 솔직한 고백이 있으니, 원우들에게 브라운의 글을 가장 먼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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