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5.5 화 23:34
기획사회
경쟁의 노예 혹은 괴물로서의 20대최철웅 / 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
이재원 편집위원  |  stjekyll@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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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호]
승인 2010.04.13  21: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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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시기 한국의 20대는 매우 문제적인 집단으로 표상되고 있다. 오로지 취업에만 목숨을 거는 무기력한 세대, 그들의 선배들이 지녔던 사회변혁의 열정이 탈각된 탈정치화된 세대, 자기계발과 스펙 쌓기에 혈안이 된 극도의 개인주의적 세대 등등. 기성세대에게 20대는 한심하고 우려스러운 것을 넘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다가온다. 최근 횡행하는 ‘20대 담론’은 20대가 과연 어떤 존재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에 대한 기성세대의 지치지 않는 호기심을 보여준다.
  물론 세대론은 위험한 담론 형식이다. 세대론을 주창하는 자는 계급과 젠더에 대한 몰이해에 입각해 피상적으로 사태를 기술하는 아마추어 분석가로, 또는 후일담의 형태로 젊은 세대를 대상화하면서 은연중에 ‘구별 짓기’를 행하는 꼰대로 낙인찍히곤 한다. 세대론이 계급겵㉣?등 중요한 사회적 변수들에 대한 숙고 없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정체성의 차이에 천착한다는 비판은 분명 타당하다. 하지만 그러한 이론적 제약이 공통의 사회적 경험을 토대로 한 세대가 공유하는 특정한 주체성이 형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마저 기각하는 것은 아니다.

실존의 굴레로서 무한경쟁

  오늘날 20대들은 계급과 젠더를 막론하고 특정한 사회적 실존 형태에 포박당해 있다. 너무나 자명해서 오히려 상투적으로 느껴지는 ‘무한 경쟁’의 압력이 그것이다. 여기서 강조점은 ‘경쟁’보다 ‘무한’에 찍혀야 한다. 그들의 선배들에게 있어 경쟁은 대학 입학과 함께 종결되는 잠정적인 것-물론 결코 짧다고 할 순 없지만-이었고, 대학에서 경험하는 공동체적 유대감(또는 학습을 통해 주조된 사회적 연대감)은 경쟁이 지배적인 규범으로 작동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작금의 20대에게 경쟁은 마치 근본적인 삶의 조건인 양 회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12년간의 경쟁을 뚫고 대학에 들어와도 취업이라는 더 험준한 관문이 기다릴 뿐이고, 운 좋게 취업을 하더라도 ‘평생고용’의 시대에서 ‘고용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또 다시 힘차게 쳇바퀴를 굴려야만 한다. 그들에게 또래집단은 동기가 아니라 잠재적인 적, 언젠간 밟고 올라서야 할 경쟁자다. 설령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이미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대입과 취업을 위한 경쟁은 결국 참가자 모두 손해를 본다는 점에서 일종의 치킨게임이다. 게임의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빈 의자의 수가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의자를 차지할 사람을 한 줄로 세우는 것. 선발방식을 혹독하게 할수록 참가자들이 투여해야 할 비용과 에너지는 증대하지만, 게임의 주관자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 게임의 주관자들(국가와 자본)에게 중요한 것은 자원을 적재적소에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줄을 세운다는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경쟁의 외부에 단 한 번도 서본 적이 없는 20대에게 경쟁은 인위적인 게임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사회의 작동원리인 양 여겨진다. 그래서 게임 자체를 거부하거나 게임의 룰을 전복하려 하는 대신, 더욱 엄격한 룰의 적용을 요구한다. 엄정한 학사관리와 상대평가 실시, 룰의 위반자들에 대한 철저한 불이익, 무임승차하는 자들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 그들은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참지 못한다. 그들에게 게임은 모든 것이며, 외부는 없다. 즉 세상은 ‘언제나-이미 닫힌 공간’이며, 따라서 현실은 절대적으로 긍정된다. 20대의 현실 인식은 “어쩔 수 없다”와 “안 될 거야 아마”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한다. 이로부터 20대를 특징짓는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형식이 출현한다. 바로 ‘비판’에 대한 거부와 노골적인 적개심이다.

비판의식의 종말과 이데올로기적 봉합

  비판은 현실에 대한 발본적인 부정이지만, 동시에 일정한 긍정의 계기를 수반한다. 비판은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끊임없이 소환하지만, 언제나 주어져 있는 현실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판은 현실에 대한 절대적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순적 긴장으로 점철된 경계선 상에서의 변증법적 사유다. 따라서 현실을 절대적으로 긍정하거나(‘자기계발’) 절대적으로 부정하는(‘루저’) 20대에겐 비판적 사유가 머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현실을 극복하는 것보다 비판을 극복하는 데 더욱 열정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비판은 배제되거나, 희화화되거나, 거부된다. 그들에게 비판은 현실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단지 견뎌내야 할 스트레스다.

  최근 논란이 된 김예슬 학생의 ‘자퇴 선언’에 대한 20대의 반응 또한 징후적이다. 김예슬의 치열한 자기성찰과 용기 있는 행동은 기성세대들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박노자는 김예슬의 ‘대학 거부’ 소식을 접하고선 마치 “유령만이 돌아다니는 황천에서 우연히 산 자를 봤을 때”의 기쁨을 느꼈다며 감격을 전했다. 그러나 정작 20대들이 보인 반응은 자못 싸늘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부적응자의 현실 도피’라고 폄하했고, 어떤 이들은 정치적 이력을 쌓기 위한 ‘쇼’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얼굴도 모르는 한 경쟁자의 탈락에 대해 그들이 그토록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예슬은 경쟁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치열한 자기비판을 수행하면서, 이것이 “나의 이야기이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김예슬의 성찰은 일종의 폭로였던 셈이다. 이것이 20대들을 불편하게 했다. 김예슬은 용기 있는 선각자라기보다 오히려 내부고발자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들도 대학이 폭넓은 경험과 교양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기업에 효율적인 부품을 납품하는 ‘브로커’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경쟁의 노예가 되어 친구들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욕망만이 남은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것도. 그런데 김예슬의 폭로로 인해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던, 이 껄끄러운 사실이 발설되어 버렸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모르는 척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김예슬이 비판한 한국대학의 현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다만 김예슬의 행위가 가진 정치성을 한 개인의 일탈적 행위로 환원시킴으로써 사건이 지닌 전복성을 봉합할 뿐이다. 봉합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순간, 쳇바퀴도 자동적으로 구르기 시작한다. 쳇바퀴를 멈추려면 다함께 옆으로 한발 내려서기만 하면 되지만, 이미 20대는 다른 이들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쳇바퀴에 올라탄 바에야 남들보다 힘차게 페달을 밟는 것이 낫다. 그들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입버릇처럼 되뇌는 ‘탈락에 대한 공포’는 결국 ‘친구들에 대한 불신’과 ‘승리에 대한 욕망’의 알리바이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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