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연 /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필립 클로델,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창 밖은 밝지만 방 안에는 그늘이 더 넓게 펼쳐져 있다. 창 밑의 라디에이터, 책상과 의자, 몇 권의 책과 사각형의 스탠드, 그리고 무덤에 눕듯이 침대에 누운 그녀를 포함하여 이제 이 방에 무언가 살아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오로지 책상 위에 놓인 장미꽃 한 송이뿐이다. 꽃의 줄기는 투명한 물 속에 잠겨있다. 활짝 핀 붉은 꽃은 방 안의 어둠을 무색하게 한다.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15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줄리엣의 삶은 어딘가 물에 줄기를 담고 연명하는 꽃의 운명을 닮아있다. 어린 아들을 잃은 상실감과 죄책감, 가족들의 외면, 사회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지적이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녀에게 아름다움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줄리엣은 모든 용서와 애정, 동정과 관심을 거부한다.
 

줄리엣은 자신의 보호 감찰관의 자살 소식을 듣고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린다. 남아메리카의 거대한 강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을 인생의 프로젝트로 삼은 감찰관의 죽음에는 아무런 예고나 징후도 없었다. 별안간 닥친 죽음 앞에서 줄리엣이 흘리는 눈물에는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책망과 회한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곁에 꽃이 피어있다.
 

몇 해 전, 선물 받은 책의 첫 페이지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나는 이미 꺾인 꽃이 물속에서 오래도록 생생한 것을 원하지 않는다.” 타인의 모든 호의를 거절하는 줄리엣의 눈빛은 그때의 나 자신을 회상하게 한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당시의 나는 나를 살게 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고, 매일같이 죽음을 계획했다. 그런데 나는 왜 여전히 살아있는가. 줄리엣은 법정에 회부되었을 때, 가족들의 질문에도 차가운 침묵만을 지켰다. 그리고 “자식의 죽음 앞에선 변명할 게 없다”고 말하는 줄리엣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도 없고, 스스로 용서할 수도 없는 고통스러운 삶을 견딘다. 나는 그녀의 말을 고쳐 쓰려 한다.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그 어떤 삶 앞에서도 변명할 것은 없다.
 

아들 피에르 살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동생 레아와 함께 유리창에 흐르는 빗물을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말한다. 잘려나간 꽃은 꽃나무로 되돌아갈 수 없다. 허나 가지에서 꺾였다한들 활짝 핀 꽃을 아름답다 하지 않을 자가 있을까. 살아있다는 그 자체는 결코 훼손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Je suis la.” 내가 ‘여기’에 있다는 뜻이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