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영 / 경원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90년대 중반 학부제 개혁을 시작으로 한국의 대학 세계에 진출한 신자유주의는 이제 완전하게 뿌리를 내린 듯하다. 대학은 들뢰즈가 <통제사회에 관한 후기>에서 교육과 관련하여 말한 대로 ‘연속적 통제’에 확실하게 종속됐다. 대학마다 상황이 다르기에 신자유주의가 상이한 양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 영혼이 신자유주의적이지 않은 대학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육과 연구를 위계화·수량화하고, 경쟁의 부단한 부과를 통해 통제하는 것이 어느 대학에서나 상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대학이 계속해서 이렇게 통제되더라도 교육과 연구가 잘 이루어진다면 대학과 관련하여 신자유주의를 애써 비판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의 지배는 현재 한국의 대학들을 파멸로 치닫게 하고 있다. 얼마 전 명문 K대의, 그것도 매우 취직이 잘 되는 ‘좋은’ 학과에 속한 학생이 “자발적 퇴교”를 선언한 사건은 이 파멸의 징후 중 하나다. 이 학생은 “이름만 남은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로 그러하다. 대학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로 자화자찬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들은 ‘사업가’이기는커녕 잘해야 ‘장사 브로커’인 존재들이다.
 

‘수탈’을 통한 지적 자원의 사유화

이 점을 꿰뚫어 보기 위해서는 우선 신자유주의와 고전적인(즉 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가 그 모든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인류사회를 장악한 것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힘 때문이다. 반면 신자유주의의 특성은 부의 생산보다는 재분배에 치중하는 데 있다. 말이 재분배이지 사실은 이미 창출된 부를 뺏는 것이다. 모두의 것으로서 존재하는 공적인 영역에의 부를 민영화를 통해 뺏는 경우도 있고, 타인의 개인적인 재산을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 뺏는 경우도 있다. 용산 참사는 바로 후자의 경우에 발생한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특성을 ‘강탈에 의한 축적’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축적방식은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생산하게 함으로써 축적되는 고전적인 자본의 축적방식(‘착취’라고 불린다)과 다르며, 오히려 자본이 역사적으로 처음 형성될 때의 ‘수탈’에 가깝다.

본성이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대학에 들어와서 하는 일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대학이 추구하는 생산 활동은 교육과 연구의 증진, 즉 인간의 능력의 증진이지만 신자유주의는 여기에 관심이 없다. 부단한 ‘신자유주의적’ 통제를 통해 교육과 연구의 증진에 필수적인 자유로움을 박탈할 뿐이며, 이미 형성된 지적겵ㅍ탔?자원을 ‘비즈니스’의 이름하에 모두를 위한 재화가 아니라 몇몇 개인의 재산으로 만드는 데 몰두할 뿐이다.

실상 신자유주의가 자본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자본의 고전적인 축적방식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한편으로는 맑스가 분석해낸 자본주의 발전의 내재적 모순―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의 고전적 논리에 따른 자본의 증식이 힘들어진다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투쟁 때문에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의 타개를 위해 신자유주의의 대두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이른바 정보화다. 정보화란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설명했듯이, 과학 혹은 지식이 직접적으로 생산력이 되는 발전된 자본주의 단계로의 이행을 나타낸다. 이제 자본에게는 지식을 상품으로 포획하는 일이 매우 중요해지고, 따라서 지식을 생산하는 일을 하는 대학이 자본의 포획망의 한 가운데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사회의 공멸로 이어지는 적자생존의 대학 개혁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의 대학 장악을 처음 법적으로 허용한 것은 대학에서 연방 정부의 지원으로 생산한 생산물을 사유재산으로 취득할 수 있게 만들어준 ‘베이-돌 법령(1980)’이다. 이로써 모두를 위한 것이었던 대학의 자원을 사유재산으로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으며, 이후 사유화의 관행이 대대적으로 미국 대학들에 확산되었고 더 나아가 해외로 퍼지게 됐다.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사유재산에 민감한 감각을 가진 교육담당부처의 도움으로 교육보다도 재산관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설립한 사립대학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이런 대학들에서 종종 일어났던 비도덕적 축재 행위는 김영삼 정부가 시행한 ‘학원비리척결’을 통해 일정하게 봉쇄되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타고 처음 도입된 학부제 개혁은 대학 ‘오너’들에게 제도화된 방식으로 다시금 자신들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결국 한국에서의 학부제는 그것을 기획한 사람들의 의도―미국과 같은 연구 및 교육조건의 실현―와는 달리 대학 운영자들에 의해서 ‘교육과 연구에 이전보다 돈을 덜 들이는 방법’으로 변형되었다.

그래도 당시의 신자유주의는 경비절감을 앞에 내세우는 소극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몇몇 사립대학들에서 볼 수 있듯이 학과 간 혹은 단과대학 간 경쟁을 부과하여 뒤쳐지는 학과나 단과대학에 불이익을 주거나, 심지어는 폐지하겠다고 협박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또한‘오너’라는 이름의 권력이 부재하여 교수들의 힘이 강한 몇몇 사립대학과 국립대학에서는 교수들이 스스로 신자유주의에 자신들을 갖다 바침으로써, ‘자율적’이기에 오히려 더욱 강력한 신자유주의 대학을 실현하는 ‘쾌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쾌거는 대학을 자신의 재산이나 이익을 늘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의 쾌거일 뿐이며, 다른 모든 이들에게는 비극을 가져올 뿐이다. 심지어는 자본에게도 해롭다. 신자유주의는 대학을 장악하여 생산력의 최고 형태인 인간의 지적겵ㅍ탔?능력의 양성을 망치고, 더 나아가 그나마 존재하던 지적겵ㅍ탔?자원도 사유재산의 형태로 소수에게만 접근 가능하게 하여 결국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낮추기 때문이다. 무자비한 대학개혁으로 인해 자본은 생산력의 발전을 가장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시점에 스스로 장애를 겪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신자유주의가 대학에 가져오는 파멸은 곧 신자유주의와 자본 자체의 파멸로 이어질 가능성 역시 잠재적으로 동반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은 한편 우리로 하여금 신자유주의와의 힘든 싸움에 좀 더 자신있게 임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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