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홍 / 관동대 교양과 교수

누스바움의 아카데미적 경력의 출발은 서양 고전 철학과 문학이다.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의 운동에 관하여>는 아리스토텔레스 원전을 편집하고, 번역하고, 주석을 붙이고, 해석한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그리스 고전 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헬레니즘 시기의 철학을 공부하면서 다양한 정치적 활동과 국제적 활동을 펼쳤다. 페미니스트로서 누스바움은 한낱 고전학자로서 대학 울타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론을 현실의 영역에 적용하려는 실천적 철학자의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그녀의 활동은 자신이 주장하는 내재적 실재론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인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혹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을 통해 이해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입장은 ‘철학함(philosophiern)’을 결국 공동체에 기초한 언어 사용과 관찰자의 공유된 경험에 한정된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다양한 사회 현상을 우리의 관심사와 동떨어진 현상으로 보지 않고 늘 관심과 배려를 보내는 태도가 오히려 세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관심이 그녀로 하여금 인문학적 범주를 넘어 사회과학적 관심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해서 여성문제, 경제발전, 법, 윤리, 교육, 인간발전, 성역할, 인권과 같은 폭넓은 사회문제 영역을 탐구하게 했던 것이다.

공감에서 비롯하는 실천적 지혜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성공적인 삶이란 어떤 것일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잘 사는 것(to eu zen)’을 바라고, 그것을 목표로 하고 살아갈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 욕구에 따라서만 살지 않으며 일정한 합리적 원칙과 판단에 따라 행위하려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로고스적 동물’이라 정의했다. 여기서 이성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로고스’는 여러 측면의 인간의 정신 활동을 반영하는 말이다. 인간은 말을 하고, 말을 통해 타자와 의사소통하고,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타자에게 내보인다.

인간은 욕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욕구와 욕망을 통제하는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인간은 로고스를 주고받으면서 복잡한 정치 사회인 폴리스를 구성해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이 로고스적 동물이라는 것은 또한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을 말한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윤리적 인간으로 거듭 태어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의 감정 상태, 삶에 대한 이해, 동정과 공감, 연민과 같은 복잡한 감정 양태들을 배우고 이해하게 된다. 나아가 이런 감정적, 지각적 균형을 배우면서 도덕판단의 기반이 되는 상상력, 감수성, 통찰력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의식을 성장·강화해 나간다.

전통적 합리주의자들은 객관주의, 탈맥락주의, 이성중심적 사고를 도덕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반면 현대에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의 계열의 학자들은 맥락을 강조하고 인간의 감정에 기초한 도덕판단, 공감, 상상력, 언어 등을 더 중시해서 인간의 내재적 감정의 영역을 인간의 이성(로고스)에 연결시키고자 한다. 감정과 이성, 욕구와 윤리가 서로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감정이 오히려 이성을 설득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덕판단, 상상력의 토대가 인간의 지각 영역에 놓여 있다고 해석한다. 이런 점에서 가치판단으로서의 감정의 역할이 인간의 실천적 합리성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감정이란 한낱 몽매하고 불분명하며 모호한 영역의 어두침침한 내면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생각과 판단에 의한 구체화된 믿음과 느낌의 혼합’으로 판단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성주의자와 달리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누스바움은 감정이 가치판단에서 중요한 인자가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행위 영역 안에 이성의 지배를 받는 욕구의 영역이 있음을 밝히고, 인간의 적절한 행위를 판단하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강조한 바 있다. 감정은 이성과 대립되지 않는 실천적이고 합리적인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천적 지혜는 마땅한 때에, 마땅한 방식으로, 마땅한 사람에 대해, 마땅한 목적으로 적절하게 응답하게 만든다. 이러한 인격을 갖출 때 인간은 탁월한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 개념을 바탕으로 적절한 반응을 하는 인간의 감정의 능력을 누스바움은 ‘지각적 균형’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타자에 대해서 무관심한 극도의 이기적인 합리성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여 타자에 대해 공감과 연민과 같은 공속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맥락에 따라 그 상황을 숙고하는 과정을 거쳐 판단하게 된다. 타자의 존재 양식을 인정하는 것도 타자와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고, 서로 간의 정서적 공감을 바탕으로 적절한 행동 양식을 찾아낸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지각적 균형을 갖춘 사람을 ‘예술적 지각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한다. 예술적 지각과 상상력은 도덕적 판단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도덕성과 개별성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요구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든다. 요컨대 ‘지각적 균형을 가진 삶’이란 예술적 상상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치료하는 수단, 철학
누스바움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윤리적 비평이 예술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엄격한 규범적 잣대로만 작품을 평가해 왔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그녀는 미학적 관심이 실천적 관심인 윤리적 관심과 별개라는 철학적 순수주의를 포기한다. 미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은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윤리교육이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상상력과 지적 지각, 감성적 지각을 통해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윤리적 사유와 욕망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만일 철학이란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지혜를 탐구하는 것이라면 철학은 문학”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까지 내놓는다. 이런 생각은 이미 <자연의 거울>을 쓴 로티에 의해, 합리성을 강조하는 전통 철학은 문학과 해석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말해진 바 있다. 

이러한 철학적 관점을 비춰볼 때 누스바움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는 입장에 선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푸코나 데리다를 비판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주장을 정당화할 만한 역사적으로 정확한 근거나 논리적 뒷받침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푸코에 대해선 그의 철학적 문제 제기가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진다는 점은 수긍하지만 그가 내세운 현대의 ‘성적 범주’에 대한 분석은 그리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 속에서 왜소화되고 또 경제적 이유를 포함한 여러 이유로 다양한 정신적 질병을 짊어지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인간의 감정은 메말라가고 서로에 대한 공감보다는 미움과 시기 속에서 고독이라는 질병의 늪은 점점 더 깊어만 간다. 누스바움은 철학이란 인간의 욕망을 치료하는 수단이라고 본다.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고 치료하는 철학은 인간을 불안정한 정신적 혼란의 상태에서 벗어나 안정의 상태로 나아가게 만든다. 우리의 삶을 이끄는 철학은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 지나치게 합리성, 보편성, 절대성을 추구한 나머지 인간의 감정이 가진 상상력을 고갈시키는 철학은 더 이상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 문학, 예술적 상상력에 기반한 인간의 삶이야말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잘 사는 삶’의 목적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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