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균 / <진보평론> 편집위원

 

한국사회 질병 보고서 : ④ 연대상실증을 극복하라
우리 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질병은 무엇일까? 이번 기획에서는 MB정부 집권 이후 우리 사회를 잠식해오고 있는 그늘진 현안들을 질병으로 비유하여 진단하고 분석해본다. 이번 호에서는 신자유주의가 노동자라는 구심점을 파괴하면서 연대가 사라져버린 우리 사회를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적(맑스주의)-녹(생태주의)-보라(여성주의) 연대라는 대안을 모색해본다. <편집자주>



오늘날 사회는 분열되어가고 있으며 불안이 일상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사람들은 총체적인 불안 속에서 더욱더 이기적인 생존을 모색하고 있으며 자신의 비루한 일상을 바꿀 수 있는 카리스마적 힘의 출현을 바라고 있다. 이는 자본에게도 위기이지만 그것에 대항하는 다양한 운동 주체들에게도 위기다. 오늘날 국민국가의 해체에 따라 사람들은 국가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했던 공공적 기능과 민주주의적 지배의 형식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그것은 카스텔이 이야기하듯이 가시적으로 네트워크 사회의 유연성과 흐름의 경제,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중앙정부로부터 지방정부로의 권력의 분산에서 나온다.

이런 위기는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현재 진행되는 자본축적의 생산력적 기반과 생산관계 사이의 점증하는 모순을 반영하고 있다. 자본은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을 자본의 증식 욕구로 바꾸고자 한다. 따라서 정보화-자동화 같은 과학기술 혁명은 인간 노동의 배제와 노동력 상품의 가치 저하를 야기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중·하위층의 실질소득 감소로 인한 빈곤화가 발생한다. 그러나 자본은 이런 위기를 성, 인종, 국적 등 다양한 경계짓기를 통해서 노동과 자본의 모순을 전이시키면서 새로운 착취의 사회적 자원들을 통합시키고 있다. 여기서 노동자-자본가 간의 전통적인 적대선, 또는 적대의 중심성은 해체되고 분산된다. 이와 같은 적대의 해체는 다른 한편으로 적대의 사회적 확산이며 새로운 모순의 창출이다. 진보운동은 이 적대의 이전과 중층화, 그리고 다원성을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대항헤게모니로 바꾸어 놓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변화된 지형 속에서 새로운 정치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다.
 

공통성에 근거한 연대의 전략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진보운동의 위기는 이런 중층적인 적대의 전이를 차이의 배제가 아닌 차이에 근거한 새로운 적대성의 정치적 지형으로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는 데서 비롯한다. 또한 다원적인 사회적 장소들이 지닌 차이만을 보면서 그것의 중첩적 공간에서 형성되는 공통성을 새로운 정치적 전략으로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정치적 전략은 더 이상 과거 정통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단선적인 노-자 모순으로 환원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성, 생태, 노동의 환원불가능한 각각의 내적 모순들이 지닌 독특성을 인정한 그 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연대는 이 차이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차이는 공통성이 배제된 차이가 아니다. 공통성은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처럼 각각의 독특성을 지닌 채 느슨한 유사성을 토대로 구축되어야 한다.

생태의 문제는 생명(↔인간중심주의), 성의 문제는 젠더와 섹슈얼리티(↔가부장제)라는 각각의 내재적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자 관계로 환원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본의 극복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생명,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그것이 생산의 사회화를 사적으로 전유하는 자본의 권력을 생산하는 현재의 메커니즘 속에서 모순과 부조리를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빈부의 문제는 경제적 빈곤화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빈곤화는 삶의 환경에서의 양극화로도 진행된다. 자연친화적인 쾌적한 환경은 제1세계와 부자들의 세계인 반면 제3세계와 빈자들은 GMO(유전자 변형 농산물)와 LMO(유전자 조작 생물체)의 실험장소가 되며 화석에너지의 쓰레기처리장이 되어가고 있다. 또한 빈곤화는 빈곤의 여성화를 생산한다. 제3세계 여성들은 자신의 돌봄노동을 제1세계 중산층을 위해 판매하며 성의 국제적 상품 교환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적대의 공통성은 자본에 대한 적대성을 통해서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진보운동이 이런 공통성에 근거한 연대의 전략을 사고하지 못하는 것은 ‘동일성의 정치학’과 ‘실정성의 정치학’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동일성과 실정성의 정치학을 넘어


동일성의 정치학은 노-자 관계로 환원하고 노동자계급중심주의를 고집하는 ‘정통’ 맑스주의에서 시작되었지만 역으로 이에 대항하는 다양한 사회운동들의 성장과정이 낳은 트라우마인 ‘부정적-원한적 정서’에 근거한 ‘정체성의 추구’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여성운동이나 생태운동은 노동운동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노동부만이 아니라 여성부, 환경부가 있다는 것은 오늘날 지배의 코드로부터 노동, 여성, 생태 어느 것도 자유롭지 못하며, 실제로는 그 안에 정치적으로 전혀 다른 두 가지의 계열이 공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적·녹·보라의 연대는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집단이나 존재로서의 노동, 생태, 여성이 아니라 그 자신들 내부에 존재하는 두 가지 계열을 적극적으로 분리시키는 데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이 시작은 차이를 공통성 생산의 내적 동력으로 바꾸는 적극적인 공감과 정서, 상상력과 정치적 기획을 통합함으로써 반자본의 대안적 사회상을 창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오늘날 진보운동이 벗어나야 할 또 하나의 정치학은 ‘실정성의 정치학’이다. 실정성의 정치학은 화폐-자본의 지배메커니즘에 의해 생산되는 현재적 삶의 형태를 ‘실재적인 것(the real)’으로 간주하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의 역동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 특히, 서구 사민당과 공산당 등 좌파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제도적이고 대의제적인 민주주의로 제한시키고 인민주권의 합성적 권력의지를 통한 생명력의 발산을 제한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문제는 이 인민의 권력의지를 전면화하는 정치적 기획이다. 그것은 제도 대 반제도의 대립을 벗어나 양자를 가르면서 인민의 자치적 권력의지를 미래사회의 대체권력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적·녹·보라, 또는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 정치운동과 제반 운동의 결합은 자치적인 권력체로서 코뮌을 생성하고 코뮌들의 연합체로서 미래사회를 구상하는 정치 기획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적·녹·보라의 가치와 연대는 핵심적이다. 코뮌사회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현재까지 인류가 발전시킨 생산력, 사회화된 생산을 사적 독점으로부터 사회 전체의 부로 전환시키는 사회화과정에 근거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설사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지구라는 자연-생태계의 생명메커니즘이 파괴된다면 어떤 삶도 가능하지 않으며, 가부장제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만인의 차이가 곧 사회 전체의 발전이 되는 사회, 지배 없는 사회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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