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종 / 홍익대 강사, 사회학

자본주의의 겨울나기 : ③대안경제체제는 어디에
최근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경제 사정이 점차 개선되고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세계경제는 작은 위기로도 휘청일 수 있는 불안정한 자본주의의 겨울을 맞고 있다. 이번 기획에서는 이러한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살피고 대안경제의 기틀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세계체계분석’의 관점은 68혁명의 영향 아래, 구조기능주의와 근대화론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했다. 구조기능주의를 제3세계의 발전에 적용하려 했던 근대화론은 서유럽과 북미의 국가들로부터 추출한 모델을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제3세계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때 동일한 발전경로를 경험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주의’는 단지 환상이었음이 점차 분명해졌다. 1세계와 3세계 사이의 사회경제적 격차는 오히려 더욱 확대되었고, 제3세계 국가들 중 발전을 경험할 수 있는 국가는 소수에 불과했다. 따라서 근대화론의 허구성과 서구중심주의의 편향을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이론적 전망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는 세계체계분석이 등장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하나의 대안적 관점으로서의 세계체계의 관점은 월러스틴의 ‘세계체계

분석’으로 보다 체계화되었다. 1974년 <근대세계체계 1>을 출판한 이래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등장한 15세기부터 500여 년에 걸친 연속적이고 누적적인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세계체계’란 용어에서 암시되듯이, 월러스틴은 자본주의의 발전이 어떤 일국적 차원의 변화가 아니라 철저히 세계적 과정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세계체계분석은 개별국가 수준의 동학을 국가간 관계나 중심부·주변부 사이의 기축적 분업과 같은 세계적 맥락에서 해석하는 ‘전체론’적 방법에 근거할 때 자본주의를 올바로 분석할 수 있다고 본다.

   세계체계분석은 마르크스의 관점과 개념들을 기본적으로 수용한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다양한 현실로부터 자본주의의 일반적 법칙을 추상해내었다면, 세계체계분석은 이러한 일반법칙이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 즉 자본주의의 일반적 속성이 축적을 향한 끊임없는 운동에 있다고 할 때, 이러한 자본주의적 경향은 정치적 진공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정치적 구조, 즉 민족국가들로 구성된 정치·제도적 조건들 속에서 역사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축적논리가 국가간 체계와 결합되어 자본이 국가의 보호 아래 포섭되거나, 국가가 자본축적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국가간 경쟁으로부터 우위에 서려는 움직임이 동시적으로 전개된다. 이렇게 본다면 근대세계체계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국가간 체계의 결합으로서, 자본간 경쟁과 국가간 경쟁이 서로 중첩되고 융합되는 근대적 시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이러한 경쟁은 위계화된 국가들로 구성된 세계시장에서 ‘독점’을 향한 경쟁으로 귀결되며, 여기서 우위를 차지하는 국가는 ‘헤게모니 국가’의 지위를 얻게 된다. 그리고 헤게모니 국가는 자신의 이익을 보편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다른 국가들에 대해 경제적·군사적 권위뿐만 아니라 도덕적 권위도 행사한다. 19세기의 영국과 20세기의 미국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헤게모니 국가였다.

<장기20세기>와 오늘날의 경제위기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계>가 15~19세기 초반에 집중하면서 세계체계분석에 관한 기본틀을 제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면, 세계체계분석의 관점에서 20세기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분석한 저작은 바로 아리기의 <장기20세기>이다. 이 저작에서 아리기는 월러스틴과는 달리 중심부·주변부의 동학보다는 헤게모니 국가들 사이의 교체와 그 내부의 축적순환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하나의 헤게모니 주기가 실물적 팽창국면과 금융적 팽창국면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헤게모니 국가는 새로운 산업부문의 발전을 통해 실물적 팽창을 주도하면서 등장하게 되지만, 곧 그러한 성장 자체의 구조적 모순과 다른 국가들과의 경쟁에 직면하여 전반적인 이윤율 하락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첫 번째 위기(‘징후적 위기’)는 실물부문이 아닌 금융부문의 팽창을 통해 상쇄되면서 다시 일시적으로 경기가 좋아지는 ‘벨 에포크(belle eoque)’가 도래한다. 그러나 이러한 금융적 팽창은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아니라, 자본의 유동성을 확대하면서 오히려 세계경제전반의 안정성을 급격히 약화시킬 따름이다. 결국 ‘최종적 위기’에 다다르게 되면서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등장하게 된다.

   아리기에 따르면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 또한 이러한 틀로써 설명될 수 있다. 19세기의 영국을 헤게모니 국가의 지위로 상승시켰던 실물적 팽창은 1873년부터 진행된 공황으로 인해 종결되었다(‘징후적 위기’). 영국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금융적 투자를 급증시킴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영국의 금융자본은 미국으로 집중되었고 결국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면서 영국 헤게모니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최종적 위기’).

   새롭게 등장한 미국 헤게모니는 자동차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부문의 성장과 법인기업이라는 보다 효율적인 조직형태의 등장에 힘입어 실물적 팽창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 또한 1968~73년의 ‘징후적 위기’를 거쳐 1980년대부터는 금융적 팽창국면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른바 ‘금융화’라고 명명되는 이러한 변화는 다시 한 번 이윤율을 상승시키지만, 실물적 팽창기에 마련되었던 케인즈주의적 제도들의 파괴를 수반했다. 금융자본은 케인즈주의적 금융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던 반면, 전후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했던 다양한 복지제도들은 침식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유동자본이 급증하면서 이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 또한 심화되었고, 이에 따라 자본을 유치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사회안전망을 제거하고 금융자본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었다.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경향이 증권시장 중심으로 세계경제를 재편하면서 90년대 후반에는 ‘신경제’라는 새로운 호황이 도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무분별한 투기자본에 의한 금융위기는 금융화와 신자유주의가 결국 대안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었던 부동산시장과 증권시장의 호황은 갑작스럽게 종결되었고, 미국을 시작으로 전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시작되었다. 이는 19세기 영국 헤게모니 시기의 금융적 팽창이 결국 최종적 위기로 인해 종말을 맞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20세기 미국 헤게모니 또한 황혼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어디로? 대안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세계체계론자들은 현재의 위기가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이며, 이제 세계는 ‘새로운 질서의 구축이냐, 아니면 총체적인 대혼란이냐’라는 선택을 남겨두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이에 관해 아리기는 중국이라는 새로운 헤게모니의 성립으로 인해 새로운 질서가 구축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그 근거로 점차 상승하고 있는 중국의 경제적 위상, 서구적 발전경로와는 다른 중국의 새로운 발전의 이상, 그리고 남반구 국가들과의 협력에 보다 무게를 두는 중국의 외교행보 등을 제시한다. 아리기는 중국 및 동아시아 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가 자원소비적이고 반(反)생태적인 서구적 발전모델을 대체할 뿐만 아니라, 북반구에 대한 남반구의 종속을 종식시킬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이 미국의 하위파트너가 아니라 미국을 대체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소 희박하다. 중국경제의 급격한 성장은 미국의 소비주의와 기축적 분업의 효과로서, 20세기 미국 헤게모니의 역사적 산물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아리기는 중국의 부상이라는 현실에, 사회적·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고 대중의 참여가 확대되는 새로운 발전경로의 이상을 결합시키고 싶어하지만 아직까지 이는 희망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체계분석은 근대세계체계와 그 변화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유용한 틀임은 분명하다. 또한 아리기의 <장기20세기>가 20세기 자본주의에 관한 매우 설득력 있는 이론을 제공한다는 사실 또한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이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까지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다소 비관적일지는 모르지만 현시점에서 어떤 구체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월러스틴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체계로의 거대한 이행기에 진입해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는 현시점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집단적 노력과 의지에 달려있다는 의미에서 불확정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변화를 위한 원칙을 세우는 것이 아닐까. 이제까지 존재해왔던 모든 이행(새로운 질서의 구축)이 지배계급들에 의해 주도되거나 영유되어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대중의 관점에서 새로운 발전경로를 모색하고 대중이 새로운 이행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일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