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준 / 영어영문학과 교수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대학선진화위원회를 구성해 부실 운영 사립대학의 구조조정을 계획하는 등 대학 연구사회는 대내외적으로 개혁과 혁신이 불가피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점에서 연구사회를 둘러싼 정치적, 산업적 압력에 대항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 내부 성찰과 정체성에 대해 반성을 모색하는 5가지 이슈를 제기해본다.

글 싣는 순서  ①학계의 사회 공헌 ②다학제적 연구의 모색 ③연구를 위한 인프라Ⅰ- 시설, 자금 ④연구를 위한 인프라Ⅱ - 제도  ⑤교수와 제자 관계  

 

  필자는 학제간 연구니 다학제적 연구니 하는 어휘들이 새롭게 회자되는 이유를 사실은 이해할 수 없다. 요즘에는 통섭(convergence)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포장되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학문방법이 사실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제간 연구라는 학문간 소통의 필요성이 새삼 강조되는 것은 먼 과거에 대한 기억의 빈곤에서 오는 새로운 성찰이거나, 아니면 특수한 학문적 헤게모니를 노린 음모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저 말장난일 수도 있다.

단순한 교류보다 새로운 발전 위한 융합을


  학제간 연구는 우선 학제가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것들 사이, 즉 ‘간(間)’을 다시 잇자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학제가 지금처럼 파편화된 것은 사실 근대학문에 오면서 새로이 생겨난 풍습이고, 그것이 우리사회에서 과도하게 적용되면서 나타난 기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시대의 삼학(Trivium)이나 동양고전의 학문방식에서는 통합적 학문이 전통이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은 자연과학, 인문학, 시학, 철학 등 모든 학문의 비조는 아니더라도 거의 모든 학문에 등장하는 익숙한 이름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문학과 물리학, 철학, 미학에 공히 등장하는 학자라면 긍정적이지 않은 의미에서의 팔방미인이란 말은 들을지언정, 깊이 있는 참고의 대상은 되기 어렵다. 언어학의 대가로서 촘스키는 널리 인정받지만, 정치학자 촘스키라든가 철학자 촘스키 혹은 생물학자 촘스키는 그만큼 인정받지 못한다. 곧, 특수한 학문분야에서의 성취만을 인정할 뿐 인접학문이나 타학문에서의 업적까지 인정받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 현대적 경향이다.


  1957년 촘스키, 푸코, 팔마리니 등의 다양한 학자들이 모여 개최한 컨퍼런스를 사람들은 인지과학의 태동으로 간주한다. 언어학, 심리학, 철학, 생물학, 전산학 등의 대가들이 모여 서로의 학문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특정한 사안에 대한 각 학문의 시각을 나누기 위해 기획된 이 모임은 당시에는 이름조차 없었고, 학제간 연구라는 구체적인 지향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날 인지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사후적 평가이다. 그러나 ‘인지과학’이 정확하게 무엇인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아직도 한 가지로 수렴되지 않을 정도로 그 정체가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인지과학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리라고 보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대해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다고 말했던 촘스키의 대답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옳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인지과학은 형성 중에 있는 학문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학제간 연구란 단순히 서로 다른 구획을 가진 학문분야들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있기만 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통섭이란 말은 융합을 통한 새로운 학문의 탄생을 유도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단순히 소통만을 의미할 때는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통섭과 학제간 연구를 위한 노력은 이미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다. 그 결과, 현재로써는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학문이 탄생하고, 반면에 동력을 상실한 기존의 학문분야들이 죽어 사라지는 것은 학문의 자기보존을 위한 본질적인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생각을 했던 사람 중에 1930년대 하버드대학교 총장을 지낸 로렌스 로웰이 있었다. 그는 소위 ‘소사이어티 오브 펠로우즈(Society of Fellows)’라는 고등연구원을 만들어 여러 분야의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들을 모아 일종의 연구자 사교모임을 만들었다. 목적은 단 하나, 이질적이고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한 달에 한 번이라도 함께 모여 마시고 먹으며 대화하라는 것이었다. 그 결과, 언어학자 촘스키와 철학자 콰인을 포함한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인류의 학문발전에 기여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학제간의 창조적 대화의 시작은 이렇게 무목적적이고 자유롭고 비압박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졌다. 일인만학(一人萬學)이던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로의 복귀는 이제 파편화된 각 학문분야의 학자들이 다시 모여 ‘합체’를 통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학제간 연구라든가 다학제적 연구라는 표현보다 ‘통섭’이란 어휘가 더 적절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더 높은 수준의 섞임과 통합을 통한 새로운 학문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는 아직도 분절의 유습에 의한 강한 압박과 자기검열, 그리고 이상한 순혈주의가 남아있는 것 같다.

다학제적 협동 연구를 위한 다양한 움직임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은 이제 학문의 당사자들뿐 아니라 학문정책 입안자들도 인식하고 있는 사안이다. 학술지원 측면에서도 학제간 연구를 권장하고 있고, 통섭을 지향하는 연구소들도 생겨나고 있다.

 MIT의 미디어랩이나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 미국 보스톤대학교의 신경인지전산의학(neuro-cognitive-computational-medical) 합동과정과 같이 다양한 연구자들이 함께 하는 연구소들이 우리 사회에서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시야를 좁혀 교내를 보아도 첨단영상대학원이나 미디어공연영상대학과 같은 학문단위의 이름부터 문화콘텐츠연구소나 마음연구회, 과학학과, 문화과학을 위한 협동과정 등의 움직임들이 다학제적 협동연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다학제적 연구는 선택지로써의 구호나 운동이 아니라, 이제 기본적인 학문방법의 하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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