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경기불황과 문학 판매량 증가


올해 국내 출판계는 최악의 불황을 맞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 판매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불경기일수록 소비자들이 꿈을 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를 주제로 지난달 14일 두 문학평론가가 메신저로 대담을 나눴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경기불황과 문학 판매량 증가  ②2009년 주목할 만한 신인 ③번역이 곧 반역 ④세계문학전집의 세계 ⑤비평에 비평이 없다

 


 

이명원(이하 이) 문학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판매량에 호조를 보인 작품이 있죠. 오 선생님은 어떤 작품이 생각나시나요?
오창은(이하 오) 글쎄요, 대표적인 작품으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이외수의 <하악하악>등이 생각나네요.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 같은 작품도 있죠.
저는 본격문학작품은 아니지만, 가수 타블로의 소설이라든가 최근 아이돌 그룹 빅뱅이 낸 <세상에 너를 소리쳐>도 기억이 납니다.
일부에서는 ‘불황시대에는 문학이 살 길이다’는 이야기도 하고, ‘잘 기획된 책이 명품을 만든다’는 이야기까지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가 저는 상당히 불만입니다.
저도 커다란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공지영씨의 에세이나 신경숙씨의 소설이란 것이 실상은 ‘위안의 수사학’으로 점철된 낡은 경향이거든요. 현실에 대한 달콤한 마취제 비슷한 건데, 백낙청 선생을 포함해서 전문가들이 정색을 하고 고평을 하고있다 이겁니다. 황석영씨의 <개밥바라기 별>도 그렇구요. 일종의 불황기에 가해지는 비평적 안간힘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개밥바라기별>의 경우 인터넷 매체와 연결해 설익은 채로 발표된 소설로 황석영 문학세계에 하나의 태작을 남긴 것인데, 스스로 고평하다니요. 신경숙의 경우도 그래요. 짠한 글의 흐름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IMF시절 김정현의 <아버지>를 연상시켜 씁쓸한 느낌이었습니다.
어제 <조선일보> 디지털 방송을 보니 신경숙씨가 대담을 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작가 본인은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을 매우 신경질적으로 부정하고 있어요. 우연히 이런 상황 속에서 <엄마…>가 발표되었다는 겁니다. 작가야 그럴 수 있지만, 사회사적으로 보면 이것은 일종의 대중무의식에 소설이 반응한 경우라고 할 수 있고, 거기에 상업주의적 판촉술이 결합해서 소설의 베스트셀러화가 진행된 경우죠.
명망 있는, 혹은 대중적으로 검증된 작가들 사이에는 이런 인식이 있는 것 같아요. ‘불황의 시대에 상업적으로 성공한 책을 많이 내는 것이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다.’ 이런 태도가 문제라고 봅니다. 문학에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 대중들이나 좋은 독자들이 오히려 궁극적으로 문학에 실망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워요.
동감입니다. 작가들이 대중에게 현실에 대한 뾰족하고 예리한 각성을 주어야 하는데 요즘 이른바 스타작가들은 ‘대중만세!’하고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보면, 유행처럼 연재되는 블로그 소설이란 것 역시 결국 소설적 양식의 쇠락을 반증하는 게 아니냐 하는 우려가 듭니다. 그 내용 또한 더도 덜도 없이 노스탤지어 소설 또는 향수소설로 보입니다. 일종의 정서적ㆍ지적 퇴행에 의존한 안전한 작품이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한국 작가들이 과연 얼마나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고, 절실하게 문학을 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공지영의 문학이 한국 중산층의 불안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게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끄는 근거지요. 문제는 그 다음이 없다는 겁니다. 사실 이 시대에 신경숙씨처럼 ‘엄마’를 외치고, 공지영씨처럼 ‘딸’의 미래를 생각하고, 황석영씨처럼 ‘나’의 성장기를 반추한다는 것 자체가 미래에 대한 전망이 차단된 데서 온 지적 허약함의 반증이 아닐까요? 최근에 읽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항의 인문학>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예술은 야수적 지반 위에 있는 통제할 수 없는 미스터리나 일상생활 속 파괴의 흔적과는 화해불가능한 상태로 강렬히 존재한다.” 그런데 과연 오늘의 문학에 그런 ‘화해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이 있는지 묻고 싶군요. 오히려 앞장서서 화해를 권유하고 있어요. 용산참사를 보세요. 누가 화해하고 싶지 않나요? 문제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의 구조에 대한 예리한 인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대중들 역시 그런 정서적 킬링타임용 독서에 빠지고 있는 것이구요. 그런 점에서 보면, 오 선생님이 언급한 대중적 스타들의 저작과 스타작가들의 글쓰기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참 회의적입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문학이 대중과 함께 약소자들을 위로하고, 사회에 대한 치유의 역할을 더 강렬하게 하는 카타르시스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치유가 일시적 전환이나 휘발적 망각으로 연결되면 곤란하죠. 현실은 점점 더 엄혹해지는데 도피라니요. 현실의 곤란 속에서 오히려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인간에게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꼭 문학만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하지만 가볍기만 하고 미래에 대한 윤리적 책임에 대해 그 어떤 환기적 효과도 마련하지 못하는 문학이라면, 문제가 심각할 수밖에 없죠.


그런 점에서 저는 요즘 조세희 선생과 같은 분이 더 그립습니다. 용산참사 직후에도 선생이 그런 말씀을 하셨죠. “30년 전의 낙원구 행복동과 오늘의 용산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더 야만적이 되었다는 겁니다. 가령 동석했던 시인 송경동씨도 오늘자 <경향신문>에 이런 칼럼을 썼더군요. ‘누가 철거민들을 망루로 올라가게 했는가.’ 사실 이런 질문들이 약소자에 대한 문학적 재현과 표현의 중심적인 문제의식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작가의 사회적 의무이기도 하구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현실에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한 것 같아 슬프기만 하네요.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죠?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 작가들, 주목해야 할 작가들도 있으니까요. 이명원 선생님께서 주목하는 작가의 작품은 어떤 것이 있는지요?
저는 오수연씨의 작업에 주목하고 있어요. 소설과 르포, 그리고 사회운동을 통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중층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작가죠. 정도상 같은 작가 역시 <찔레꽃>을 통해 탈북 난민, 범위를 넓히면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난민적 상황을 아주 흥미롭게 반추하고 있죠.
오수연 작가의 <황금지붕>은 쉽지 않은 작품이지만, 세계화의 문제와 전지구적 폭력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 같아요. 저는 최근에 이시백의 <누가 말을 죽였을까>를 보고 한국의 농촌 현실을 다시 발견했답니다. 풍자가 살아있고, 지금의 농촌 현실을 통해 한국이 생명과 먹거리, 그리고 농촌사회에 대해 얼마나 겸허해야 하는가를 보았어요. 재미도 있고 풍자도 통쾌해서 인상적이었어요. 시 쪽은 어때요?
최근에 김사이씨의 <반성하다가 그만둔 날>을 읽으면서 마음의 울림이 컸어요. 여성노동자의 욕망과 열망, 그리고 절망이 대위법적으로 전개되는 시집인데, 오늘의 현실과 연결시킬 때도 매우 의미 있는 작품이었죠. 휠덜린 식으로 말하면, 궁핍한 시대에 오히려 인간의 위대한 진정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 아니었나 싶네요.
저는 황규관의 <패배는 나의 힘>과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황규관 소설은 성찰하는 힘이 돋보여, 우리 현실을 반성하게 했고요. 심보선의 시는 시대를 아우르는 시적 재미가 있어요.
이제 끝마칠 시간인데, 저는 오늘의 문학을 이렇게 풍자하고 싶어요. <도덕경>식으로 말하면, 지금 문학으로 일컫는 문학은 가짜문학이다. 다시 <임제록>식으로 말하면, 부처를 만나면 부처만 죽이지 말고, 낡아빠진 이 문학도 죽여달라고 작가는 오히려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비평가인 저 역시 고민이 깊습니다.
문득 발터 벤야민이 “문학은 경험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보여줌으로써 세계에 개입한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생각나네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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