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20세기> 조반니 아리기 지음 / 백승욱 옮김 (그린비, 2008)

역사적 자본주의의 좌표와 곤경
 

아리기의 <장기 20세기>가 십오 년 만에 우리말로 나왔다.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 (2008), <동아시아의 재부상>(2003)과 함께 아리기 3부작이라 할 만하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책이 <장기 20세기>이다. <제국주의의 기하학>(1979)과 같은 초기 저작에서 시작한 그의 지적 궤적은 이 책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책은 역사적 자본주의로서 근대 세계체계의 축적 순환(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미국 사이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새로운 지적 순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책의 부제대로 ‘우리시대’ 즉 장기 20세기의 기원과 전개를 해명함으로써 현재의 역사적 좌표와 곤경을 이해할 전망을 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장기 20세기의 끝자락에 왜 현실사회주의가 망하고 자본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는지,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미국 헤게모니 하의 세계 자본주의(미국의 세기)가 동시에 위기에 처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관계가 있다.
제국주의 단계에 이른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론으로 자본주의의 붕괴가 임박했다고 믿었던 좌파나,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속에서 자본주의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믿었던 우파에게 부족했던 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동역학에 대한 이해였다. 아리기가 개입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며, 그의 지적인 개입이 여전히 적실한 것은 그가 현재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낳고 있는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의 구조적 추세와 확산의 원인에 대해 설명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위기의 동역학


근대 세계체계로서 역사적 자본주의의 동역학은 결국 위기(카오스)와 위기 해결(거버넌스)의 동역학, 즉 자본주의 위기의 동역학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와 우리시대의 기원을 해명함으로써 과거의 일반적 위기론과 비판적인 거리를 확보하는 한편,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실물적 축적(성장국면)과 금융적 축적(불황국면)의 교대 사이클의 두 번째 국면(conjuncture)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20세기 후반부터 금융 세계화와 그 위기의 정세가 과거의 그것들(네덜란드~영국)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 즉, ‘반복 속의 차이’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현재의 관건인 것이다.
아리기의 지적 궤적과 이론은 위대한 사상가들(특히 마크르스, 폴라니, 브로델, 프랑크, 월러스틴 등)과의 지적인 교류와 쇄신이라는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상가들을 살펴볼 때에도 유의미하다. ‘제국인가, 새로운 제국주의인가, 세계 헤게모니인가’라는 논쟁을 촉발한 제국론(특히 네그리)을 정치의 과잉과 경제의 결여(반경제학)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자본주의(마르크스)와 영토주의(베버)의 변증법의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리기의 기여가 크다. 그렇지만 아리기의 <장기 20세기>가 90년대 초반의 저작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때는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가 갓 전면화되기 시작한 시점이며, 따라서 아리기의 논의만으로는 현재의 추세와 전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는 특히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의 작업들이 유용하다.
자본주의 세계의 역사적 동역학을 분석하는 아리기와 생산양식으로서 자본주의의 동역학을 분석하는 뒤메닐을 대질시키고 소통시킬 때, 1930년대 대공황과 현재의 위기가 어떻게 같고 다른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장기 20세기> 자체도 비판적으로 정정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이후의 작업들이 갖는 한계에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중국)의 재부상에 대한 과도한 평가와 일반화가 역사적 자본주의의 동역학 분석에 대한 자신의 기여를 스스로 손상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국, 유럽, 동아시아, 남미와 아프리카 즉 세계적 규모의 위기는 단일한 세계 헤게모니(미국이나 중국 등의 새로운 등장)에 의해 관리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현재의 위기가 전면화되면 결과는 매우 비극적일 수 있다.

 

현재는 사회운동 자체가 위기


미국에서 시작된 2008년 이후의 자본주의의 위기는 1930년 대공황과 달리 새로운 체계적 축적 사이클(미국)을 개시한 실물적 팽창 국면(19세기말~1920년대)이 아니라 금융적 팽창 국면에서 나온 것이다. 20세기로의 전환기에서 1930년대 대공황기는 전체적으로는 사회운동(노동자운동, 페미니즘, 중산층 개혁운동, 국제주의)이 발전하던 시기로, 이 운동들이 당시의 위기가 전면적인 파시즘화로 치닫지 않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렇지만 현재는 이러한 사회운동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 구조의 위기와 운동의 위기가 만나는 국면은 새로운 대전환을 위한 과잉결정의 국면이 아니라 비극적인 과소결정의 국면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느냐에 나, 너, 우리와 인류 공동의 미래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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