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기 / 파리8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프랑스의 기술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 1952~ )는 자크 데리다와 대담을 나눈 철학자로 한국에 처음 소개됐다. 2002년에 번역 출간된 <에코그라피: 텔레비전에 관하여>는 데리다와 스티글러의 강연과 대담 등을 묶어 펴낸 책이었다. 그러나 데리다라는 거대한 이름과 겨루기에는 너무나 생소한 이름이었던 탓인지, 이후 한국에서 스티글러에 관한 독자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에게 그는 단지 데리다의 제자 중 하나로서만 기억(또는 망각)되고 있다.그렇지만 현재 프랑스에서 스티글러는 기술과 관련된 독창적인 철학적 성과를 왕성하게 생산하는 손꼽히는 철학자이다. 대표작 <기술과 시간>(총3권, 1994~2001)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관심사는 ‘기술’과 ‘시간의식’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색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스티글러는 그리스적 철학 전통이 기술의 문제를 파생적인 것으로 치부해 철학의 영역에서 배제시켰다고 비판하며, 기술이야말로 철학의 중심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인간은 본질상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존재이며, ‘나’(심리적 개체)인 동시에 ‘우리’(집단적 개체)로서 생성된다. 이런 ‘심리적·집단적 개체화’가 발생하기 위한 조건으로 스티글러는 기술적 환경(milieu technique)을 내세운다. 텔레비전, 휴대전화, 인터넷을 비롯한 온갖 테크놀로지에 의존해 사는 오늘날, 그의 논의는 더욱 각별한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스티글러의 사유는 철학, 정치학, 미학을 넘나든다. 그의 다양한 관심사는 특이한 인생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젊은 시절 은행강도 혐의로 5년간 교도소에 수감됐는데 그때 독학으로 철학을 공부했고, 석방 뒤 데리다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프랑스 국립시청각연구소와 음향/음악연구소의 소장직을 맡았으며, 현재 퐁피두센터의 문화개발부 디렉터로 재직 중이다. 또한 2005년부터 ‘아르스 인두스트랄리아(Ars Industralia)’라는 정치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시청각 테크놀로지 연구의 오랜 경험과 당대 정치에 대한 꾸준한 관심은 그가 고유한 미학과 정치학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을 제공해줬다.
스티글러는 현대사회를 극도로 산업화된 소비사회로 정의한다. 산업의 테크놀로지는 마케팅을 통해 소비자의 리비도를 획일적으로 통제하면서 ‘나’와 ‘우리’의 독특성을 파괴하며, 규격화되고 균질화된 기억과 행동방식만을 남긴다. 이런 통제사회에 맞서 단순히 기술문명을 거부해버리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휴머니즘일 뿐이다. 스티글러는 기술을 거부하는 대신 기술에 대해 사유하면서 상징계의 통제에 맞서는 정치학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또한 산업적 마케팅의 통제 대상이 소비자의 감성이라는 점에서 그의 정치학적 모색은 새로운 미학적/감성학적 경험의 추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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