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효상 / 서울대 강사·서양사전공

오늘날 한국의 청년층, 특히 20대의 보수성과 고립된 개별성은 상당히 놀라워 보인다. 식민지시대 이래 청년학생이 진보적인 사회운동의 선두에 섰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것은 놀라움을 넘어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대한 10대들의 항의가 ‘촛불집회’라는 형식으로 터져나오면서 그런 현상은 더욱 도드라져 보이기까지 한다.

기성질서에 도전한 청년학생세대


이렇게 10대의 행동주의와 20대의 부동성이 교차하는 시점에 40주년을 맞이하는 68년 혁명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것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청년 학생세대가 보수적이고 안온했던 1950년대를 깨고 나와 기성질서에 도전했을 뿐만 아니라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했던 급진적인 실험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의 정치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해당 사회의 가치체계를 바꾸어나갔고, 그 결과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인간관계를 더 평등한 것으로 바꾸어냈다. 이런 점에서 60년대와 68년은 소수자의 권리 확장을 촉진한 문화혁명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런 점에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일상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68을 따라하건 거부하건, 찬미하건 비난하건, 그것이 특유한 시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특정 세대의 자기 형성과 노력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소극(笑劇)으로 반복되는 역사적 현실에 자족하거나, 끓어오르는 화산 옆을 지나고 있다는 엄중한 현실을 외면하게 될 것이다.
우선 60년대의 온상이라 할 수 있는 50년대와 60년대가 장기 호황의 시대, 물질적 풍요의 시대, 대량소비의 시대였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런 시대적 배경은 60년대 세대에게 낙관주의적 전망을 가지게 했다는 점 이외에도 최소한 두 가지 효과를 미쳤다. 하나는 대학의 양적 팽창과 대학의 역할 변화로 인한 효과였다. 이전과 달리 과학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직접 통합되었고, 여기서 대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19세기 말부터 발전한 현대 대기업은 중간 관리자층을 다수 필요로 했고, 이런 인력을 공급하는 곳도 대학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전후 베이비붐이 결합하여 대학이 엄청나게 늘어나 멀티버시티(multiversity)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대학의 변모기에 대학의 이상을 둘러싼 갈등이 나타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 하나의 시대적 효과는 ‘틴에이저’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청년세대가 경제적 주체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새로운 현상은 이들이 소비주체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록음악의 소비인데, 록음악은 청년세대의 반항성을 포착하면서 대량소비를 부추겼고, 이는 다시 청년세대에게 새로운 주체성을 선사했던 것이다. 더구나 록음악은 새로운 패션과 함께 교통과 통신의 발전 속에서 전세계적인 청년 현상으로 전개되어 시대의 공통언어로 자리잡게 된다.
그렇지만 물질적 풍요라든지, 새로운 소비 현상이 곧바로 급진적이거나 반항적인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비록 소수에게서 시작되지만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맞서 균열을 내는 문화적·정치적 도전이 필요하다. 이것 또한 5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비트’철학, 실존주의, 맑스주의의 부활, 상황주의, 성해방의 이데올로기 등이 그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도전은 때로는 고립적으로, 때로는 공명하면서 60년대의 청년 급진문화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갔다. 여기에 더해 미국과 서독의 ‘SDS’라는 학생 조직들은 당대의 사건 속에서 정치적 전위 역할을 했다.

68세대가 마주친 사건들


그럼 이들이 마주한 당대의 사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청년세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가장 크고 장기적인 사건은 냉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를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놓은 냉전은 선과 악이라는 흑백논리 속에서 사람들에게 불합리를 강요하는 체제였고, 냉전 속에서 급격하게 확대된 핵전쟁의 위협은 부조리함 자체였다. 그러한 시기에 1956년에 터져 나온 헝가리 사태, 수에즈 사건, 스탈린 비판 등은 냉전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세계적으로 폭로한 사건이었다.
또한 각국은 특유한 역사적 문제를 안고 있었고, 이것 또한 60년대 세대에게 강렬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을 구성한다. 오랜 인종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미국 흑인들의 민권운동은 청년 학생들의 행동주의와 이상주의에 불을 붙였고, 알제리전쟁은 프랑스 지식인과 학생들의 양심을 자극했으며, 불충분하게 이루어진 인적 청산과 전후의 권위주의는 기성체제에 대한 서독 학생들의 대항을 촉구했다.
그리고 베트남전쟁이 있었다.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아시아의 작은 농민국가에 핵폭탄을 제외한 모든 최신식 대량살상무기를 들이댄 미국을 전세계의 청년들은 서방이 자랑하는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괴물로 보았다. 이렇게 이 전쟁은 서방 사회의 오랜 문제인 제국주의와 인종주의를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성 좌파의 무능력과 배신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청년세대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하였다.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은 또한 새로운 운동의 형성과 급진화의 동학을 보여준다. 미국과 서독의 SDS는 말할 것도 없고, 베트남연대캠페인 등 새로운 조직이 베트남전쟁 반대를 통해 다수의 청년 학생을 동원하면서 자기 연대성을 확인해 가며, 먼 곳에 있는 피억압자에 대한 연대 속에서 자기 사회의 문제, 자기 문제를 찾아내게 된다. 그 결과는 당대 사람들이 ‘체제’라고 지목한 현 질서를 전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68년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해 1월에 있었던 베트남의 구정공세는 하나의 출발 신호였고, 4월에 있었던 컬럼비아대학 반란은 하나의 도약이었으며, 5월의 파리는 폭발이었다. 8월의 프라하와 그 다음해의 이탈리아는 강력한 여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이런 정치적 흐름과는 별개로 ‘반문화’라는 현상이 등장했다. 히피로 상징되며, ‘지금 여기서’ 해방된 삶의 스타일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유토피아적인 반문화는 그 자체로 보자면 소수의 문화적 반란이라는, 오래된 것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60년대의 반문화가 당대에 큰 충격으로 다가오고,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앞서 말한 정치운동과의 관련 속에서 청년세대에게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반문화와 정치운동의 결합과 교차가 68년의 고유한 효과인 일상의 혁명, 문화혁명을 가능케 한 가치적 기반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68년 혁명은 장기적으로 전후의 경제적 번영과 냉전, 이데올로기적 돌파와 확산, 해당 사회가 가진 고유한 문제의 분출로서의 다기한 사건 등을 배경으로 하며, 이러한 구조, 이데올로기, 사건에 대한 주체들의 반응적 형성 속에서 준비된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베트남전쟁을 통해 맞닥뜨린 거대한 ‘체제’의 부동성, 그리고 마치 이를 증명하는 듯이 보이는 경찰의 야만적인 폭력은 더 크고 단호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68년을 이렇게 다양한 요소와 주체의 교차와 수렴으로 본다면, 오늘날 한국의 10대들이 보이는 적극적 행동주의는 인권 관념의 확산 속에서 이들에게 형성된 새로운 주체성에 기인한 것이며, 20대의 보수성은 이들이 직면한 암울한 경제 현실 때문에 발생한 주체성의 탈각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라도 있을 수 있는 청년들의 급진적 문화와 정치가 새로운 지평을 여는 디딤돌이 되기 위해서는 다기한 역사적, 사회적 요소들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전위적 움직임과 그 어떤 ‘사건’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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