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23일 '대안세계화 운동의 이념과 전략' 국제학술대회 참가차 서울을 방문한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를 만났다. '신좌파와 68혁명에 대한 고전'이라 불리는 <신좌파의 상상력>의 저자인 카치아피카스 교수와 함께 68혁명의 유산을 되새겨 보고, 한국 사회운동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평가와 조언을 들어보았다. <편집자주>

 

 ■ 조지 카치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

미국 보스턴에 있는 웬트워스 공대(Wentworth Institute of Technology) 인문사회과학부 교수이다.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1980년 광주항쟁과 당시 아시아 각국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좌파의 상상력>과 <정치의 전복>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수많은 저서가 있다.

 

 

 


▶ 당신은 68혁명을 상상력과 자율성을 실험한 새로운 ‘문화혁명’이자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을 비롯해서 우파들은 68혁명이 성과보다 부채를 더 많이 남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부정적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우파들뿐만 아니라 많은 좌파들 또한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68혁명은 확실히 여성, 동성애자, 흑인들을 포함해서 소수자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미국에서 당시 동성애는 범죄였고, 여성들은 일할 때 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은행계좌를 열 때에도 남편의 승인이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낙태할 권리도 없었다. 68혁명 이후에 학생들의 삶도 완전히 바뀌었다. 젊은이들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의 소수자들은 당시 공장파업위원회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았고, 처음으로 프랑스를 집처럼 느꼈다고 한다. 완전한 문화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그에 대한 모든 저항으로부터 이득을 취해 오고 있다. 우리가 1830년, 1848년, 파리코뮌을 되돌아본다면, 심지어 러시아혁명조차도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강화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건들처럼 68혁명 또한 자본주의체제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결과적으로 성공한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혁명은 시작과 동시에 실패하고, 실패와 동시에 새로운 성공을 이끈다.

▶ 최근에 발표한 몇몇 글에 따르면 1980년 광주민주항쟁이 1871년 파리코뮌과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적 운동과 유사점이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간에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나.
우선 항쟁 기간 중에 범죄행위가 급격하게 감소했고, 아래로부터 무장저항이 발생했으며, 민주적 의사결정을 위한 조직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했다는 점을 유사점으로 들 수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유사점은 그 상황에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긴밀하게 연합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대 최정운 교수는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그 상황을 ‘절대적 공동체’라고 표현했다. 민중들에겐 공통의 목표가 있었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에너지를 공동체와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집중시켰다. 심지어 광주에서 민중들 간의 연대는 파리코뮌보다도 강했다. 파리코뮌은 다중심적이었고, 그 때문에 쉽게 분해될 수 있었다. 차이점은 파리에는 이미 잘 훈련된 국민군이 있어서 파리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총을 쏠 필요도 없었던 반면, 광주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으로 시민들이 모여 정부에 대항하는 시민군을 조직했다는 점이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시위를 하고, 시민들이 매일 집회를 열었다. 5일 동안 수만 명이 집회에 참여했다. 이들은 자발적 자치역량을 가지고 정부와 협상하기도 했고, 무기나 관을 조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운동권이 아닌 사람들이 항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 광주항쟁에 관해서는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나.
1980년에 독일에서 머물고 있었다. 당시 광주항쟁에 관한 뉴스를 봤는데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에 대해 알고 싶었고, 이후 한국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물어보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왔나요?” “혹시 광주에서 온 사람들을 알고 있나요?” “어떻게 해야 광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나요?” 결국 지인들의 도움으로 1999년 5월 18일에 광주항쟁기념식에 참석할 수 있었고, 광주에서 현재 부인도 만났다. 지금은 전남대학교에서 객원교수 신분으로 광주항쟁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 당신은 68운동과 1980년 광주항쟁처럼 민중들이 자발적이면서도 무계획적인 운동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을 ‘에로스 효과(Eros Effect)’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
마르쿠제는 내 스승이었다. 그가 1979년에 세상을 떠난 후, 1983년부터 내가 ‘에로스 효과’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에로스’ 개념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보통 우리가 에로스라고 말할 때 불행히도 그것은 곧 섹스를 의미한다. 섹스를 할 때 개인 간의 유대관계는 굉장히 강렬하다. 그러나 에로스는 섹스보다 더 많은 것을 함축하며, 사람들 간의 강력한 유대관계 일반을 의미한다. 60년대의 운동에서, 그리고 광주에서 공동체의 유대와 공동체감은 굉장히 강렬했다. 혁명의 목적은 일상생활에서 에로스를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에로스 효과는 곧 해방을 향한 본능적 욕구, 억압에 저항하는 원초적 본능이 승화되고 발현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그런 멋진 유대를 만드는 순간, 그 공동체감은 섹스보다도 더 강렬하다.

▶ 최근 미국산 소고기 전면 개방과 이명박 정부의 실책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전국 각지에서 열리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어린 학생들과 젊은이들의 자발적인 모임이 막강한 추동력이 되어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하고 엘리트 정책입안자들이 그들의 결정에 대해서 재고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성과이다. 내가 평가하기에 더더욱 중요한 것은 거리를 점거한 중ㆍ고등학생들에 의해서 회복되고 있는 낙천적인 정신과 투쟁의지이다. 작년에 내가 한국에 도착한 날은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바로 그날이었다. 도착 후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했을 때, 그들은 굉장히 상심해 있었고, 선거결과에 좌절해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촛불집회는 아직 완전히 절망하기엔 이르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놀랍게도 지금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젊은이들의 운동은 그들을 다시 낙천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변화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것은 에로스 효과의 한 차원이다. 그래서 이번 사건은 에로스 효과의 집단적 승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라고 말할 수 있겠다.

▶ 전지구적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사회운동의 방향은 어떠해야 할까.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는 계급 구분을 양극화시키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전체 직장인의 50%가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아주 적은 급료를 받고 있다. ‘분열 정복’ 전략은 서구에서 고대 로마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오래된 전술이다. 그것의 효용성에는 오직 연대와 유대로만 맞설 수가 있다. 우리는 급격하게 이기적이고 원자화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이에 대항하는 가치를 신장시킬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노무현정부의 진보적 정책과 거리의 집회 사이에는 일종의 역관계가 있었다. 즉 정부의 정책이 좋으면, 집회는 적었다. 그런데 이명박정부는 이미 새로운 사회운동을 결집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어쩌면 이에 대해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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