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신합법화 요구하는 타투이스트 이랑씨
   ■ 문신합법화 요구하는 타투이스트 이랑씨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그렇다면 문신은? 현행법상 한국에서 문신은 ‘의료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의사 외에는 시술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전세계에서 문신시술을 의사에게만 허가한 나라는 오직 한국뿐이다. 그러나 ‘문신전공의’가 없는 현 상황에서 모든 문신은 당연히 불법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넌센스 같은 일을 두고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피부의 0.3~1mm 깊이에 색소를 주입하는 문신과 피부를 완전히 관통하는 귀 뚫기, 머리카락의 PH수치를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염색은 무엇이 다른가.” 즉 문신의 ‘신체 위해’가 문제라면, 피어싱이나 머리염색 또한 의사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신자나 시술가를 법으로 처벌하는 논리는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인류학적으로 봤을 때, 문신은 모든 문화권에서 발생해 온 인류 보편의 미적 행위였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우리에게도 고대 삼한시기부터 문신 관습이 있었다. 문신에 부정적 혐의가 덧씌워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에 문신을 형벌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조선시대에 유가적 신체관의 영향을 받아 문신은 패륜적 범죄행위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문신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삼청교육대에 보내졌으며, 현재까지도 문신자는 대중목욕탕이나 사우나ㆍ찜질방 같은 공공장소에 출입을 제한받고 있다.

이처럼 국가적 문신혐오와 처벌은 꽤 오랜 역사를 가져왔지만, 이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재판관 앞에서 국가는 개인의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국내에서 비의료인의 문신시술합법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3년, 영화 <조폭마누라>와  <달마야 놀자>에서 문신 분장을 담당한 타투이스트 김건원씨가 경찰에 기습 연행되어 실형을 받고나서부터이다.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난 김건원씨는 말했다. “3년째 바늘을 잡지도 못하고 있어요. 말이 집행유예죠. 예술의 자유도 없는 한국 사회가 바로 감옥 아니겠어요.” 김건원씨 사건에 대한 항거로 타투이스트 김준씨는 문신전시회를 열고 “문신을 예술행위로 인정해야 한다”며 헌법소원을 냈으나 기각되었다. 또 다른 타투이스트 이랑씨는 대학로에서 문신시술 퍼포먼스를 하다가 연행되어 벌금을 물었다. 지난해에는 김춘진 의원이 문신시술합법화법안을 발의하면서 문신합법화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촉발되기도 했다.

한국 외의 모든 나라에서는 당연하게 허용되는 문신할 권리. 혐오스러운 것은 문신이 아니다. 우리가 혐오스러워 해야 할 것은 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국가권력, 그것의 편협하고 폭력적인 취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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