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광현 / 문화연대 정책위원장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초래한 지구적 생태위기와 양극화에 맞서 최근 남미에서는 변화의 물결이 확산되고 대안사회를 향한 발걸음들이 활발해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 사람들은 과거 ‘현실사회주의’가 야기했던 ‘역사적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대안사회를 향한 자유로운 도약 앞에서 주저하고 있다. 이런 장애를 넘어서려면 역사 재해석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에서도 맑스 사상과 고전 맑스주의를 변별하면서 “19~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을 재평가하고, 스탈린주의 비판과 사회주의·코뮌주의의 재정의를 위한 노력들이 최근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흔한 오해와는 달리 맑스는 ‘위로부터의’ 계획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특성이라고 보았고, 그 ‘전제적’ 성격을 비판했다. 맑스는 자본주의의 전제적인 계획생산에 대해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코뮌주의’)을 대치시켰고, 후자로부터 생산의 진정한 재조직과 ‘아래로부터의 참여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맑스의 코뮈니즘은 전제적 계획에 따른 공동생산의 의미를 지닌 번역어 ‘공산주의 (共産主義, 국가자본주의)’와는 무관하다. 코뮈니즘을 ‘코뮌주의’로 재번역하려는 것은 이런 오해를 불식하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라는 ‘코뮌’의 고유한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한편 맑스의 코뮌주의는 단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국지적 연합’에 머물렀던 중세의 도시 코뮌들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또한 19세기 초 오엔이나 푸리에가 추구했던 유토피아적 공동체주의와는 다르게 코뮌들 사이의 연합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를 해체하면서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하려는 현실적인 변혁운동이다. 이 때문에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코뮌주의 사회로의 실제적 이행의 과제(사회주의)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고자 했다. 맑스가 한편으로는 위로부터의 전제적 계획에 반대하면서 그와 동시에 국가 장치의 변형과 해체라는 이행 전략이 없는 무정부주의(적 코뮌주의)에 반대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렇게 볼 때 맑스의 코뮌주의는 아래로부터 참여계획에 입각한 코뮌적 네트워크의 힘을 통해 자본주의 국가장치의 변형·해체를 연속적으로 가속화해 가는 사회주의적 이행과정을 거쳐 전 지구적 차원에서 코뮌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따라서 일국적 차원을 넘어서는 세계적 차원의 실제적인 사회변혁 전략이다. 이런 의미의 맑스적 코뮌주의는 아직까지 실현된 바 없고, 또 그 변혁 전략 역시 아직까지도 충분히 발전되지 못하고 있다.
 맑스는 젊은 시절 변혁 전략의 개요를 제시했을 뿐 1848년 혁명 실패 후에는 당시 성장가도를 달리던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 원리를 규명하는 데 집중했다. 이후 영국 헤게모니 쇠퇴과정에서 발생한 러시아 혁명은 스탈린주의로 변질되었고, 미국 헤게모니가 성장의 정점에 이르렀을 즈음 발생한 1968년 혁명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데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행 전략의 부재로 산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하는 오늘의 상황은 100년 전 영국 헤게모니가 쇠퇴하며 등장한 대안들끼리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기와 유사하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맑스의 코뮌주의를 새롭게 발전시키려는 논의들이 활발해지는 것은 이런 시대적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맑스적 코뮌주의의 문화사회적 성격
 맑스가 생각한 코뮌주의 사회는 어떤 성격의 사회였을까. 맑스는 <코뮌주의자 당 선언(1848)>에서 부르주아 사회와 대비되는 코뮌주의 사회의 성격을 다음 같이 설명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살아 있는 노동은 축적된 노동을 증식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코뮌주의 사회에서 축적된 노동은 노동자들의 생활과정을 확장키시고 풍요롭게 하며 후원하는 수단일 뿐이다. 이와 같이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나, 코뮌주의 사회에서는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자본이 자립적이며 개성적인 반면에 활동하는 개인은 비자립적이며 비개성적이다.”
 부르주아 사회가 축적된 노동(죽은 노동, 자본)의 증식을 위해 산 노동을 강제하고 착취하는 사회, 사회성원들이 (소외된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최우선시하고 찬양하게 만드는 사회라면, 코뮌주의 사회는 축적된 노동이 오직 노동자들의 생활과정을 확장시키고 풍요롭게 만드는,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문화적 역능이 활짝 개화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수단으로서만 기능하는 사회이다. 이런 점에서 부르주아 사회는 자본축적을 위한 소외된 노동이 제일의 사회적 가치가 되는 ‘노동사회’라면, 코뮌주의 사회는 개개인의 문화적 역능의 개화가 제일의 사회적 가치가 되는 ‘문화사회’이다. 일각에서는 이런 등식화가 노동을 폄하하는 것이라며 반대한다. 그러나 맑스는 다음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전의 모든 혁명에서는 활동양식은 언제나 변하지 않았으며 단지 노동을 새롭게 분배하는 것이 문제였다...하지만 코뮌주의 혁명은 기존 활동양식의 변혁을 지향하며 노동을 폐지한다”(MEGW, vol.5:52).
 노동을 새롭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양식을 변혁하여 ‘노동의 폐지’와 더불어 ‘모든 개인들을 위해 자유롭게 된 시간과 창출된 수단에 의한 개인들의 예술적, 과학적 교양 등’을 통해 ‘생활과정을 확장하고 풍요롭게 하는 사회’, 이것이 곧 노동사회가 아닌 문화사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원상 ‘선물 주기’(munus)와 ‘함께 함’(com)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코뮌’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특성을 지닌, 서로 다르기에 함께 선물을 주고받는, 비배타적이고 공생적 성격의 ‘사회적 개인’들의 연합에 의한 ‘선물경제’ 사회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생태근본주의는 분자적 개인, 몰적 국가, 근원적 자연을 특권화하고 있다. 이들과 달리 ‘선물경제적’ 성격의 코뮌주의 문화사회에서는 개인과 사회와 자연 중 어느 것도 특권화되지 않은 채 삼자 사이의 비-배타적·공생적·공진화적 관계가 활성화된다.
 개인이라는 개체 자체도 분자적 세포들의 무작위적 집합이나 하나의 몰적 덩어리가 아니라 지적·정서적·윤리적·신체적 역능들이 복잡하게 교직된 역동적 관계망이자 자연적 과정과 사회문화적 과정의 교차 속에서 생성·변화하는 그물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되는 개인 주체들에게서는 여러 역능들의 공진화가 억제되기 때문에 자연적 과정과 사회문화적 과정의 구조-접속은 일그러지고, ‘메타체계들의 체계’로서의 주체 역능의 발달 방향은 반생태적이 된다. 반면, 코뮌주의 문화사회에서 자유롭게 공진화하는 ‘사회적 개인’(맑스)들의 경우 여러 역능들의 공진화를 통해 자연적 과정과 사회문화적 과정의 교차가 생태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이행의 경로 찾기: 생태문화코뮌 네트워크를 통한 사회 공공성의 코뮌적 전화  
이런 사회로의 이행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행의 관건은 자립적·호혜적 삶의 양식을 구축하려는 아래로부터 코뮌들의 확장된 네트워크 구성과 이들의 활력적 연대를 통한 자본주의 국가장치의 변형·해체라는 연속혁명적 과정의 복합적 조직화에 달려 있다. 노동자-다중 연대를 통한, 참여계획경제를 실천하는 다양한 평의회, ‘생산자-소비자 협동조합, 비자본주의적 여가소비 프로그램을 포함한 문화교육과정, 교육·의료 등 사회공공성의 전면 재구성 등을 추동하는 전국적·지역적 ‘생태문화코뮌 네트워크’의 구성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노동운동의 생태문화적 주체 혁신과 동시에 노동운동과 소수자 운동의 새로운 연결망이 필요하다.
그동안 좌파운동은 두 갈래로 나뉜 길을 각기 걸어 왔다. 제도 안에서 민주화·사회화를 위한 투쟁과 제도 밖에서 새로운 코뮌을 구성하려는 길이 그것이다. ‘사회적 공공성의 코뮌적 전화’를 위한 실천적 모색 없는 코뮌운동은 역사적으로 보아 이념적 전위주의나 고립된 공동체주의로 머물 수밖에 없다. 반면, 제도 내 사회화 투쟁만을 강조할 경우 아래로부터의 자립적 동력 구성에 실패하고, 개혁주의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이행을 위해서는 양자 간 선순환구조를 만드는 일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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