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종말

우리는 소통하기 위해 대상과 대상에 대한 관념 그리고 그 관념에 대응하는 언어를 필요로 한다. 누군가가 대상을 언어로 표현하고 다른 누군가가 그 표현을 통해 대상을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대상에 대한 공통의 관념과 그에 대응하는 언어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언어가 가리키는 의미가 언제나 동일하지는 않다. 기표는 기의와 결코 만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질 뿐이다. 단지 기표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공통의 관념을 토대로 잠시 동안 기의에 머무를 수 있을 뿐이다. 어떤 경우 그 언어가 놓여 있는 사회적 배경에 따라 특정 기표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곤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술(art)은 바로 이러한 사례의 전형이다.
오늘날 예술작품은 보통 ‘범상치 않은’ 개인이 ‘범상치 않은’ 영감을 가지고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사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예술은 다른 문화적 산물 - 특히 대중문화 - 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특권화 된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 달리 말해 예술은 범상치 않은 것이므로 일상생활과의 괴리를 기반으로 정의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일상생활의 맥락 속에 놓여있었다. 특히 일상생활의 지배적 요소로서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예술품이 만들어지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은 art라는 용어를 (오늘날 예술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지는) 회화와 조각을 지칭하는데도 사용했지만, (오늘날 예술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냥과 조산술, 예언술 및 수학을 지칭하는데도 사용했다. 영어 ‘art’는 법칙에 입각한 합리적 과정의 제작활동 일반을 뜻하는 히랍어 ‘techne’로부터 유래한다. 이 단어가 라틴어 ‘ars'로 번역되어 영어 ’art'가 된 것이다.
이러한 기반 아래서 스타니제프스키는 그의 저서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예술작품으로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미술이 아니라고 선언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그는 <모나리자>의 엽서에 펜으로 수염을 그려 넣고 엽서의 아래에 L.H.O.O.Q.('Elle a chaud au cut'라는 불어를 소리 나는 대로 알파벳으로 옮긴 것으로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는 의미이다)라고 적어 놓은 뒤샹의 작품은 미술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과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 주의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근대에 만들어진 관념으로 근대 이전의 예술(이라기보다는 기술)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은 많은 왜곡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 현재의 고정관념의 지평 아래에서 과거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예술은 근대에 만들어진 관념이다. 그 관념으로 예술에 영원불멸의 가치를 부여하여 특권화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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