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에릭 홉스봄 외 지음 <만들어진 전통>, 박지향·장문석 옮김(휴머니스트, 2004)






 

낡은 상식과 새로운 지식의 충돌






 

장문석 /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강사






TV 프로그램 중에 골동품에 가격을 매기는 게임이 있다. 당연히 오래된 것일수록(따라서 희귀한 것일수록) 가치가 높다. 물론 시간 자체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고는 믿기 어렵다. 오히려 사람들이 오래된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가치가 생긴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오래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가. 이를 작가 쿤데라처럼 불멸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으로 돌려야 할까. 그러나 쿤데라 자신도 알고 있듯이, 인간이 불멸성을 희구하는 것은 그 자신이 유한적인 존재임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전통도 마찬가지다. 전통의 힘은 그 불변성에 있다. 하나의 전통은 그 기원을 추정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것인 만큼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사람들은 시간 앞에 요지부동하는 전통이 보여주는 바로 그 힘을 경배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불변성을 숭배하는 것은 거꾸로 그들이 너무도 가변적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사람들은 전통 사회에 살면서 전통을 애써 강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통은 오직 그것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근대적’ 상황에서만 의미를 얻는 요소이다.


물론 전통들의 세계에도 서열이 있다. 가보보다는 국보가 더 귀하게 평가되듯이, 특정 가문이나 사회 집단의 전통보다는 민족의 전통이 훨씬 더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민족이 최상의 가치 기준으로 통용되는 민족주의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세계에서 전통은 오직 ‘민족적’일 때에만 최고의 숭배 대상이 된다.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의 문화유산도 어김없이 민족의 정수(라고 가정된 것)를 오롯이 표현하는 것들 일색이다. 이제는 진부해진 구호를 원용하자면, 세계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민족이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그 자체 세계성을 담고 있는 공간,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민족주의의 세계이다. 유구한 민족의 전통들은 이 민족주의의 세계를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는 값비싼 골동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골동품들이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상품임을 알게 된다면, 전통의 가치를 숭배하고 그 값을 지불한 이들은 충격에 빠질 것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감식가들이 있다. 에릭 홉스봄을 필두로 한 일련의 역사가들은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불변의 민족 전통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실은 18-19세기 이후에 발명된 것임을 폭로한다. 가령 스코틀랜드의 민속의상 킬트가 18세기 후반 잉글랜드 의류업자가 만들어낸 것이라든지, 고색창연한 영국 왕실의 의례가 BBC 중계와 더불어 확립되었다는 것, 그리고 인도군 병사들의 터번 복장이 영국의 식민지배자들이 고안해낸 것이라는 사실 등은 독자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홉스봄은 유럽 각국의 대중적 공식 의례들이 주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사이에 집중적으로 발명된 것들임을 보여줌으로써 전통이 현대 대중민주주의의 필수불가결한 장치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들은 입을 모아 그와 같은 전통들이 국가에 대한 시민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사용되는 민족주의의 도구임을 역설한다.


그렇다면 <만들어진 전통>은 대중의 상식에 도전하는 책이다. 물론 출간된 지 벌써 20년 이상이 지난 지금, 이 책의 진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것이 되었다. 실제로 상징/담론이 현실 그 자체를 구성한다는 이론이나 민족이 근대 사회의 산물이라는 이론은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상식이 된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소수의 상식과 다수의 상식 간에 벌어지는 충돌이다. 소수의 상식이라는 말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느냐는 의문은 제쳐놓더라도 말이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전통 앞에 무릎을 꿇고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다.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배운 지식이 바깥세상에서 간단히 무시된다고 토로한다. 그리하여 소수 지배자들의 민족적 상징/담론의 조작과 대중의 민족주의적 열광은 현대 세계에 여전히 전쟁과 인종 갈등과 인권 탄압 등의 음험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요컨대 상식은 때로 혁명적 변화를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때로는 위대한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을 어떻게 상식으로 만들 수 있는가. 이는 그간의 <만들어진 전통>에 대한 많은 논평들에서 한번도 다루어지지 않은 주제인 듯하다. 그러한 질문을 통해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충돌 자체에서 충돌 ‘이후’로 옮겨간다. 여기서 문제가 단지 프로파간다나 계몽의 전략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문제는 강렬한 민족적 고취 뒤에 숨어있는 대중의 욕망이다. 이는 홉스봄도 지적하듯이 대중의 민족적 열광이 단지 소수의 조작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유한한 개체로서 대중은 탈신성화된 사회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불멸하는 민족을 통해 영생을 희구하며, 원자화된 개인으로서 대중은 고독하게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황량한 시민 사회에서 민족에 소속됨으로써 위로받는다.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근대 사회의 정서적·감성적 분비물인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이성적·논리적 구성물인 지식이 대중 감정을 ‘장악하여’ 새로운 상식으로 변환되는 것은 대단히 난망해 보인다.


그럼에도 지식이 종래의 상식을 의문시하고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낡은 상식이 대중의 일상적 삶의 현실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주어진다. 가령 민족주의의 사례에서 특정한 욕망의 충족은 다른 욕망의 억압을 의미할 수 있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인권·평화·민주주의와 관련된 문제들에서 민족적 상짚담론이 드러내는 억압적 측면들을 강렬하게 느끼고 있다. 민족에 대한 지식은 바로 그러한 억압된 욕망들에 대한 대중의 느낌을 자기인식으로 명료하게 표현하고 욕망으로 투사된 대중의 꿈과 희망을 진실하게 표상함으로써 종래의 상식에 도전하고 새로운 상식을 구성할 수 있다. 그람시의 말을 빌리자면, 대중들의 감정/정념이 이해가 되고 지식이 됨으로써 지식인(지식)과 대중(상식)은 ‘유기적인’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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