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토론

김혜련 / 백석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대중소비문화의 명암을 부각시킬 때 지적되는 면모들 중의 하나가 키치이다. 키치는 흔히 수용자의 관점에서 사물의 의미가 변화하는 양태로 생각될 수 있다. 단순한 병따개일지라도 여성의 몸매를 흉내된 모양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것은 기능적 가치 외에도 관능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페티시로 기능할 수 있다. 키치는 본디 ‘쓰레기를 모으는 것’을 의미했지만, ‘가짜를 속여서 팔다’라는 동사로 발전하면서 기만성을 내포하는 개념이 되었다. 
사물의 의미는 중립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정치적 차원과 연결된다. 더 나아가서, 특별한 경우, 사물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바꿀 수 없게 하는 규범과 가치들이 공존한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행위나 사회 제도들이 그러한 경우이다. 따라서 키치의 문제는 단순히 사물의 의미나 가치의 변화에 있다기보다는, 옹호되어야 할 인간적 가치와 자유를 표상하는 특정한 사물이나 활동의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속이려는 데에 있다. 즉 키치의 가치는 미리 설정된 타깃 감정을 향유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물의 의미를 왜곡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키치는 구조적으로 센티멘털리즘과 연관된다.
토마스 쿨카는 키치를 예술적 실패의 사례로 다루고 있는데, 이는 키치가 나쁜 예술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예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키치라는 개념 자체의 존재가 상대주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키치는 규범적이면서 분류적인 개념이다. 키치라는 개념 자체는 예술에 대한 반명제로서 제안되었다. 그리고 이 용어가 필요한 것은 예술과 키치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을 막기 위해서다. 둘째로, 키치 사용자들은 키치의 표준적인 사례들의 키치성에 대해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키치가 단순히 나쁜 예술로 그치지 않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키치는 어떤 점에서 예술적 실패인가.

기만적인 정서적 경험
키치 제작자나 키치 사용자가 예술이 표상하는 진술을 그릇된 방식으로 인용하는 데에 예술적 실패의 원인이 있다. 그렇다면 키치는 왜 그릇된 인용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아서 단토는 인용을 수사적 행위로 보고, 인용자가 청자에게 인용문이 원래 의도했던 효과를 반복적으로 발생시키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예컨대, 그림에 대한 안목이 거의 없는 어떤 부자가 렘브란트의 자화상 원작 한 편을 거실에 걸어두고 그 그림을 통해 자기 자신을 과시하려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부자는 그 자화상을 실제로 감상하고 작가의 관점을 이해하고 화풍이나 기법을 향수한 것이 아니다. 단지 렘브란트의 작품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통해 다른 사람의 눈에 자신이 근사하게 보이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경우, 원작의 소유는 일종의 인용이고 그 인용의 목적은 원작이 갖는 예술적·사회적·경제적 가치로 소유자인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키치는 청중이 인용된 표현의 의미와 그 가치를 인식하고 있을 때, 화자가 인용에 포함되는 심오한 진리를 표현한 것인 양, 원문과 인용문 간의 유사성은 참으로 존재하거나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둔갑시킨다.
키치가 훌륭한 예술 작품들을 모방하거나 복제함으로써, 또는 그렇게 모방된 사물을 사용함으로써 심미적 탁월성을 ‘인용’하려는 것 자체가 키치의 기만성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키치 제조자나 키치 사용자가 심미적 가치를 인용하는 목적은 심미적 가치를 이용하여 원작을 만든 예술가가 의도하지 않은 정서적 충만성을 누리려는 데 있고, 바로 이 점이 키치를 키치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하려는 것은, 키치를 통해 얻어지는 정서적 충만성은 원작에서 지시된 상황이나 대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키치적 사용 자체를 통해 얻어지는 기생적인 정서적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대중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은 원작의 심미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가 대중에게 알려져 있어서 인용자가 원작의 외관을 인용함으로써 원작이 성취한 권위나 역사적 가치까지 원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키치는 예술의 겉모양을 닮았지만 그 겉모양 자체에 주목하거나 가치를 두지 않는다. 그 표면을 넘어, 그것에 의해 환기되는 의도된 정서적 충만을 경험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키치 경험이 결코 예술의 감상과 같지 않으며, 키치에 대한 설명이 예술 개념과 예술의 감상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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