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토론 - 키치

양민석 /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키치와 키치 취향에 대한 미적 평가가 사회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고 사회적 관계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분석하는 것은 키치에 대한 논쟁을 미학적 차원에서 사회과학의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브루디외는 문화자본의 축적에 따른 미학적 코드의 차별적 형성을 설명하면서, 개인의 취향과 문화실천이 물적 토대에 기반한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을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예술과 키치와 같은 대극적 가치평가 속에서 이러한 차별적 취향은 그것을 배태시킨 사회적 조건이 사상된 채 예술을 이해하는 탁월한 존재 또는 저급한 감각을 지닌 ‘키치인간’을 대변하는 인간의 본질적 차이로 인식된다. 이 점에서 볼 때, 개인취향의 차별성은 단순한 문화적 규정성을 넘어 문화적 헤게모니와 나아가 정치적 정당성을 둘러싼 상징권력과 관련된 문제이다. 뮐러의 언급처럼 “개인적 집단적 행위자들은 그들의 물질적 이해를 추구하기(계급투쟁) 위해서, 또한 그들의 관념적 이해를 관철시키기(계급화 투쟁: 구별짓기) 위해서 문화를 상징자본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특권과 위계질서의 정당성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지배문화의 위상을 높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피지배 집단과 계급의 문화와 문화적 실천이 부적절함을 부단히 상징화시켜 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계급사회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우세한 집단의 문화적 실천은 ‘부정적 대상’을 통해서 문화적 명분을 더욱 획득해 가고 자신의 방어기제를 강화시켜 간다. 이런 점에서 키치의 ‘문화적 부당성’이 상징화되고 키치취향은 정통성을 부여받은 문화취향의 구별짓기를 위한 준거적 대립물이 된다. 예술 특권과 함께 정통 예술로 인정받는 문화 취향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지속적 ‘존립’에 대한 관심뿐만이 아니라 구별짓기의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는 ‘키치의 배제’에 대한 관심을 배태하고 있다.

취향 판단의 권력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명명권력을 둘러싼 투쟁’이다. 이것은 무엇이 예술이고 키치인지, 또는 예술성 높은 문학작품이고 통속물인지 등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 과정 속에서 특정 산물이 예술품이 되기도 하고 키치적 대상이 되기도 하는 ‘상징적 연금술’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표찰행위의 규정력은 언론이나 비평가처럼 충분한 명명권력이 있거나 카리스마적인 지위가 있는 경우 더욱 효과적이다. 그러므로 키치의 미적 평가에 있어 분명한 것은 취향판단의 이분법적 구별이 개인의 자유로운 자율성이 아니라, 문화적 생산이나 수용과 관련한 사회적 권력관계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다.
키치와 통속성은 특정한 미적 대상의 고유하고 영속적인 본질이 아니라 이러한 표찰행위의 작용원칙에 따라 규정되며 문화적 위계질서 속에서 미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배제되는 것이다. 그래서 키치현상을 사회적 연관성과 무관하게 미학적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오류이고, 키치가 역사적으로 변화해왔으며 사회적으로 설명 가능한 현상이라는 점이 다시 한번 강조될 수 있다. 이제 키치취향에 대한 가치평가는 ‘키치사회’ 또는 ‘키치의 시대’라고 설명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문화산업의 확대로 누구나 소비대상으로서 키치적 생산물에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고급-저급 문화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현실에도 불구하고 취향에 대한 양분화된 가치평가와 그러한 구별짓기 욕구만은 항상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키치판단은 문화 간 경계투쟁의 도구가 되는데, 특정 문화수준들이 서로 근접해 갈수록 키치라는 평가와 비난을 수단으로 삼는 경계투쟁이 더욱 치열해 간다. 어떤 예술작품이 광범위한 대중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향유되어 지면 예술 애호가들은 이 작품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문화적 정당성을 인정받는 예술취향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술작품으로서 더 이상 특별한 구별짓기의 효과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키치의 배제와 부단한 재생산은 문화영역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상징투쟁의 과정과 맞물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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