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코드로 자리 잡은 웰빙은 삶의 질 향상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의 방향과도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각종 언론에서 이에 대한 소식들을 쏟아내면서 웰빙이란 것이 왜곡되어 비추어지기도 한다. 웰빙은 이런 열풍에 휩싸이면서 점차 그 본뜻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문화기획에서는 사람들이 왜 웰빙에 열광하는지, 이런 열풍의 문제점과 진정한 웰빙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조은섭 / 문학평론가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허버트 셀던은 1950년대에 이미 인간의 체형을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현대사회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  일으킨 바 있다. 왜냐하면 각 체형스타일이 개인의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평가와 함께 체형별로 성격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체형이란 엑토머프(키가 크고 깡마른 체형), 엔도머프(땅딸보체형) 그리고 메조머프(근육질의 운동선수체형)등이었다. 엔도머프형 남성은 명랑하고, 쾌활하며, 사교적이지만 무능하고, 지능이 떨어지며, 떠벌리는 성향이 있고, 메조머프형 남성은 박력 있고, 똑똑하고, 균형 감각은 있지만 자기도취성향이 심한 물질숭배형이다. 엑토머프형 남성은 균형감각과 똑똑함, 그리고 인간미는 있지만 유행에 민감해서 소비성향이 강하다는 말을 했다. 여성들 63%가 선호하는 남성체형으로 메조머프형을 꼽았다니, 예나 지금이나 박력과 물질이 좋긴 좋은가보다. 하지만 반대로 남성들이 선호하는 여성체형은 단연 엑토머프형이었다. 여자는 일단 키가 크고 말라야 남근사회에서 사랑받는 조건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셀던의 분석에 일부 공감은 하지만 문제도 있어 보인다. 그의 글을 읽는 많은 독자들에게 오토노미(자율성)를 죽이고 헤테로노미(타율성)를 조장하는 듯한 몸에 대한 뒤틀린 시각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노예가 된 현대인

물론 요즘은 근육질 남자보다는 영화 ‘왕의 남자’에서 주연을 맡았던 이준기 풍의 여성스러운 남자, 즉 메트로섹슈얼리티가 뜨고 있다. 하지만 여름기운이 후끈 달아오르는 날일수록 셀던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자는 근육질 몸매에다 가슴 패인 티셔츠를 입어야 제격이고, 여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쭉쭉 빵빵한 몸매에 초미니 치마와 탱크 탑을 걸쳐야 제 맛이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어쨌거나 요즘은 몸에서 멋과 섹시함이 풍기는 것을 최고로 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웰빙상품이 봇물을 이루고 비너스와 아폴론을 닮은 남녀들이 멋과 섹시함을 한껏 자랑할 수 있는 노출의 계절이 도래했다. 때를 맞춰 기업들은 웰빙여행, 웰빙화장품, 웰빙푸드, 웰빙아파트까지, 웰빙이란 접두사를 붙인 상품들을 쏟아내며 쾌재를 부른다. 그러나 상품로고들을 보면 포장만 바꾼 새로울 게 없는 것이라 짜증스럽다.
사실 웰빙-정신과 몸의 건강, 안락함, 편안함-을 추구하는 근본은 위생적인 삶과 무병장수다. 더 쉽게 표현하면 쾌변, 쾌면, 쾌식과 함께 안위 속에서 무탈한 삶을 꾸릴 수 있게 하는 수단 정도로 여기면 된다. 그런데 편견이 많다. 기업과 언론, 그리고 셀던 같은 심리학자를 비롯된 전문가집단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로 가득한 편견 탓에 개인은 속수무책이다. 텔레비전을 비롯한 비주얼 매체들이 현대인을 조종할 수 있는 조종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비주얼 매체를 최대한 이용해 편견을 세상에 흩뿌리고 나면 기업들은 본격적인 틈새공략에 나선다. 물론 기업들이 막대한 자금을 풀어 언론매체를 휘두르기 때문에 장사는 저절로 굴러간다. 현대인의 삶이 단순함의 반복에 있기 때문이며 독립적인 자아를 표방하는 오토노미 보다는 타인들의 눈치를 살피고, 사교성을 빌미로 타인과 똑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살아야 피곤하지 않다는 헤테로노미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이다. 타율성이 자율성을 지배하는 것이다. 특히 ‘외적인 룩’과 ‘음식’에서는 그런 성향이 더욱 또렷하다.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은 커지고, 그러면 그럴수록 현대인들은 비주얼 매체들이 조작해내는 역동적인 이미지들의 노예로 전락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들에겐 예전의 보릿고개를 잊고 싶은 욕망이 있고,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갈증이 있기 때문이다. 두 집단의 상충되는 듯한 욕망코드가 아이러니하게도 웰빙문화에서 같은 코드로 접속 된다. 그것은 대중들을 상대로 누구나 따라하면 예뻐질 수 있을 것처럼 현혹해대는 몸짱 얼짱 광고모델들과 더불어,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병명들을 거론하며 대중들에게 겁을 주며 채찍질과 당근을 제공하는 의사와 심리학자들의 가당치않은 망발들이 한몫 거들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모델들이야 그렇다 쳐도 일부학계의 덕망 있는 인사들과 언론기자들까지도 기업들이 작정하고 흘린 상품이미지 홍보에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몸만 있고 정신이 배제된 조작된 웰빙 이미지들이 현대인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분, 초단위로 편견으로 가득한 이미지들이 디지털 매체를 타고 전파되며 청소년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시대가 닥친 것이다.

웰빙의 실체에 대한 자각 필요

사실 ‘웰빙’, 적어도 한국에서 통상적으로 모든 상품의 접두사로 헤프게 쓰이는 웰빙이란 단어는 ‘골빈 집단과 골빈 상품’을 통칭하는 신조어쯤으로 여겨야 마땅하다. 왜냐면 웰빙의 근원인 몸과 정신을 분리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정신에서 떨어져 나온 몸은 이제 웰빙열풍을 타고 조각의 대상이 되었다. 이를테면 새롭고 멋들어지게 조각된 몸에 새로운 정신을 심게 되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 웰빙상품들의 하나같은 홍보 모토들이다. 허나 그것들은 진실을 외면한 처사다. 그 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허황된 꿍꿍이속들이 금세 눈에 띈다. 개인을 집단화시켜 지배하겠다는 전략에 무릇 개인들이 무방비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몇 안 되는 장동건, 이준기, 이효리 등 선망의 광고모델 몸매에다 과연 창의적이고 다면적인 수많은 자율적인 개인의 정신을 심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회의적인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오토노미를 말살하고 헤테로노미를 부각시켜야 장사가 잘된다는 뻔한 광고카피 정도로 치부해버리면 될 것을 우리는 비주얼 매체에 점점 종속되어 자율성을 잃고 기업들의 뜻대로 집단 패키지 상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거론한 셀던의 3가지 스테레오타입체형과 편견들은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매일같이 흔하게 접하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때 혈액형으로 사람들의 성품을 칼질해대며 꼴값 떨던 방송인들과 심리학자들의 작태일 것이다. 필자는 웰빙을 떠들어 대는 사람들을 파트릭 쥐스킨트의 <향수>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Grenouille=개구리)에 비유하고 싶다.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 간혹 그 소설맥락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런 경우다. 주인공 그루누이는 개구리란 이름에 합당한 특성을 지녔다. 진드기처럼 끈적이는 삶, 음습한 성격, 못생긴 외모 앞에서 어른거리는 것은-향수와 관련된 것이면-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잔혹한 공격성을 지녔다. 그는 향수를 만든다. 사람들은 그가 만든 향수의 꼭두각시가 되어 날뛴다. 그는 자신의 향수를 풍겨 사람들 간에 사랑과 증오, 분열과 살인, 용서와 화합을 인위적으로 조장한다. 사람들은 그 향수의 진원지를 모른다. 그 실체를 모르고 날뛴다. 웰빙시장에 열광하는 많은 대중들이 꼭 그 짝이다. 몸짱 얼짱이 나오는 광고이미지 몇 컷에 울고 웃는 많은 대중들은 자신들이 꼭두각시 게임에 초대된 부속품, 패키지 상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를 가리켜 많은 학자들은 다양성이 사랑받는 사회, 자율성이 존중되는 사회라 서슴없이 일컫는다. 하지만 비주얼한 디지털 시대에 다양성과 자율성은 이미 허물어진지 오래다. 집단 월드컵 열풍이 그러하고, 단체여행이 그러하고, 인터넷상에 생긴 수많은 커뮤니티들이 그러하고, 학교생활이 그러하다. 우리주변의 모든 것들은 독립적인 자아보다는 집단적인 자아를 배양시키는 헤테로노미 강박 속으로 알게 모르게 우리의 등을 떠밀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요즘 일고 있는 웰빙열풍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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