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호 [Code읽기] 시선이 되어버린 철학적 인간
숭고의 미 - 자아의 반영상

박영선 /철학과 강사
  
색면추상화가로 알려진 바네트 뉴만(Barnett Newman)은 아름다움보다는 숭고함의 미학을 표현한 화가이다. 그의 작품에는 재현된 대상을 지시하는 어떤 암시도 찾을 수 없다. 그럼 도대체 뉴만은 자신의 회화를 통해서 무엇을 주장하는 것일까. 회화는 형상적 재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관념은 이미 오래된 것이다. 따라서 회화는 ‘현시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할 수 없다는 말이고, 이것은 회화가 숭고를 위한 어떠한 잠재적 가능성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뉴만이 보기에 이런 저주는 재현을 고집하는 회화에는 타당한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회화가 ‘재현’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현시할 수 없는 것’ 또는 절대성, 무한성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이념’을 현시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은 회화에서 아무 것도 안 보여주는 것이다. 리오타르(Lyotard)는 현시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주는 미술을 포스트모던 미술이라고 정의한다. 포스트모던 미술은 전통적 기법에서 완전히 일탈하여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존재함을 충격과 놀라움으로 암시해야하는데, 이런 점에서 아방가르드에 속한다. 그는 전체와 일(ㅡ)자, 개념과 감성의 조화, 의사소통에 대한 향수를 지닐 수 없는 현시대에 예술은 카타르시스적 위안을 제공하는 아름다움의 미학이 아니라 숭고의 미학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대 숭고미학의 장을 열었던 버크(Buck)는 공포가 우리에게 즐거움의 원천일 수 있다고 보았다. 예컨대 폭풍우에 해안으로 밀려드는 산더미 같은 파도의 위력은 가장 강력한 정서를 낳는다. 그때 느끼는 공포감은 오히려 ‘즐거운 공포’가 된다. 물론 실제적인 위협과의 안전한 거리라는 단서를 달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버크에 의해 해명된 숭고의 정체는 심리학적이었고, 결국 칸트의 초월주의적 미학에 의해서 극복된다. 즉 시야에 펼쳐진 외부 자연의 거대한 ‘크기’나 위력적인 ‘힘’은 숭고를 야기하기는 하지만, 숭고 체험의 본질적 근원은 그런 대상의 표상에 의해 야기되는 무한성, 절대성의 이념인 것이다.

예컨대 밤하늘 창공의 무수한 별들의 존재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하며, 단지 파스칼이 표현한 바대로 ‘그 무한한 영원한 침묵이 우리를 두렵게 할뿐이다’. 이러한 자연의 ‘무형식’은 우리로 하여금 신적이며 초월적이고 무한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이 때 느끼는 숭고는 우리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이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런 이념을 생각할 수는 있으나 현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념을 현시해야 한다면. 바로 뉴만의 그림이 그렇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그 무엇을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하나의 숭고한 대상이 되기를 원했다. 거대하고 위력적인 자연이 숭고를 야기하는 것처럼 그는 거대한 화폭과 강렬한 색채로 인간 내부에 있는 이념을 불러 내려한 것이다. 숭고가 ‘바라봄’에 성립하듯이 뉴만의 그림은 무한성 앞에선 우리 인간 자아의 반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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