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호 [Code읽기] 희미한 옛 기억의 그림자

권희철 편집위원

‘뽕’이 문제란다. 그것도 ‘공인’의 뽕이 문제란다. 위 두 문장은 고스란히 우리 사회의 선험적 지표로 자리잡고 있다. 이에 대해 의심하는 것 자체가 문제시되는 게 우리 사회다. 이 점, 명백하고도 적나라한 현실이다.그러나 우리 사회가 얼마나 허약한지는 위 두 문장으로도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이것만 반박되면 근간 자체가 무너지리라는 것. 그래서일까. 이성의 허약함이 관성화된 의식으로, 금기의 격자로 둘러싸인 집단적 무의식으로 손쉽게 자리잡는 것이.‘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엑스터시와 히로뽕과 대마초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일 뿐이다. 더 나아가 뽕의 경계가 어디인지도 분간하지 못한다. 뽕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해보렴. 우리의 상식으로는 담배와 대마초를 들겠지만, 이조차 그리 분명하지 못하다(뽕의 상태란 그 강도이겠는가, 물질 자체이겠는가).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뽕이란 그저 허구의 산물일 뿐이다. 이처럼 우리는 뽕의 물질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뽕’은 어떤 정신적 상태를 가져올까.

우리는 흔히 ‘뿅간다’고 말하지만 한 번도 ‘뿅간’ 상태가 무엇인지 확인한 적이 없다. 개인에 따라서는 소주 석 잔으로도, 담배 한 모금으로도 그렇다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뿅간다는 건 그저 개인적인 경험의 차원일 뿐이다. 상식적으로도 뿅간다는 건 개체의 신체 상태와 관련 깊다. 게다가 우리는 뽕의 효험조차 알지 못한다. 어느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따름이다. 뽕은 우리의 신체를 망친다고. 그런데 뽕으로 구겨진 연예인들이 몇 달 뒤 복귀의 둔갑을 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것도 더욱 건강해진 모습으로 브라운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뽕으로 망쳤다 말하는 신체는 역설적으로 더욱 건강해진다.

이렇듯 뽕의 효과에 대해서도 편견만 가득하다.런데 우리는 사사로운 뽕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뽕 사태란, 유명 연예인들의 행각, 명문 대학생의 광란, 유치원 여교사의 환각파티 정도다. 단란주점 여종업원의 뽕에 대해서, 구걸하는 걸인의 환각에 대해서, 거리의 악사의 필로폰 주사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문제가 되는 것은 ‘특수한’ 사례일 뿐이다. 연예인과 명문 대학생과 유치원 여교사의 공통점은 묘한 환상을 자극한다는 데 있다.연예인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 희생양이다. 그들에겐 ‘공인’이란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여기서 공인의 어원적, 법적 의미를 따지는 것은 우습다. 그저 공과 사의 어설픈 구분법만 지적해도 충분하다. 공인이 섹스 행각을 벌이건 말건, 기상 천외한 범죄를 했건 말건 그건 오로지 ‘사적’ 영역의 문제다(公이 완전히 私를 배제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그건 空이다). 하지만 공인의 행위 영역이 어디인가 따지는 일보다 더 문제삼아야 할 것은 이런 거다.

공인이라 규정하는 자는 누구인가. 뽕이 나쁘다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도대체 이 복잡한 사태를 구성하고 질서지우려는 자는 누구인가.나는 아니라고? 그러면 우리는 왜 즐기고 있는가. 예진아씨가 색녀로 둔갑한 영상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상상하게 되나. 여기서는 단지 이런 점만 확인하려 한다. 위 모든 항목이 ‘금기’로 표상되는 것이라면, 그 금기의 안팎을 따지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금기에는 주체와 타자가 없다.’ 다만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수많은 청순가련 아씨를 꿈꾸고, 또 그 변태적 상상을 즐기며 우리의 욕망은 한층 더 속박될 것이라고. 이것이 황수정 효과의 전모다. 그건 아련히 떠오르는 먼 옛날 기억과 닮아 있다. 교단에서 죽도록 매맞는 한 아이를 보며 (때로는 그것을 즐기며) 몇 달간은 개기지 못했던 기억, 그 처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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