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호 [문화쟁점: 조폭신드롬] 폭력을 견뎌낼 감성적 힘 필요

이동연 / 문화평론가

개인적으로 나는 조폭영화를 좋아한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대부>를 보면서 복수에 배어있는 ‘꼬뮨적인’ 갱스터의 미학에 매료되었고, <히트>에서 열연한 알 파치노의 연기를 보면서 마초적 건달의 ‘후까시’를 알았다. <넘버3>의 명장면들을 반복적으로 학습하면서 ‘쌈마이들’ 특유의 수사학을 배웠고, <초록물고기>에서는 삼류 양아치 새끼의 비극적 인생을 훑고 지나간 소위 이 바닥의 생리와 사회적 비극을 견줄 수 있었다.

조폭영화는 학삐리 같은 나에게는 건달에 대한 무의식적 동경을 꿈꾸는 마음의 거울 이미지와도 같고, 양아치 그네들의 어법과 걸죽한 수사학을 재미삼아 따라하고 싶은 모범 견본과도 같으며, 아무생각 없이 혁띠 풀어놓고 스트레스나 신나게 푸는 심심풀이 땅콩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비품인 이 조폭영화가 한국영화산업의 미래를 짊어진 문화산업의 총아로, 자신의 급우를 살해하게 만든 흉측한 살상 무기로 둔갑해 있다. 3~40대 남성들의 끈끈한 사춘기 향수주의를 조폭의 개인사를 통해 그려낸 <친구>가 한국영화사상 최다 흥행인원 8백만명을 집결시킨 <친구>에서부터, 경주의 조폭적 정체성을 운운하며 코믹액션 느와르를 선언한 <신라의 달밤>이 3백50만을 돌파하고, 뒤이어 이른바 조폭의 젠더를 질문케 한 <조폭마누라>가 4백만에 육박하듯 이제 한국영화는 조폭에 살고 조폭에 죽게 된 듯하다. 여기에 <킬러들의 수다>가 상한가를 치고 있고, <두사부일체>, <달마야 놀자>가 흥행 릴레이에 바톤 넘겨받을 준비만 하고 있다.

한때 충무로가 조폭적 성향이 있어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양아치들의 ‘뽀다구나는’ 사업이어서 자본 자체가 조폭적이었다면, 지금 학삐리 영화제작자들은 조폭 자체를 자본화하려는 듯하다.  잘 나가면 항상 뒤끝이 좋지 않은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친구>를 40번이나 본 한 학생이 자신의 같은 반 급우를 무참하게 찔러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 97년 10대 조직폭력 서클인 ‘일진회’가 경찰에서 고해성사를 하면서, 만화를 보다가 모방범죄를 저질렀다고 고백한 후에 5백10만권의 만화가 분서갱유당한 사건처럼, 이번에도 역시 청소년보호론자들은 영화의 잔인한 폭력성을 사건의 주범으로 연일 성토하고 있다. 그 사건이 있는 와중에도 조폭영화는 흥행에 흥행을 거듭하면서 대중들의 일용할 문화적 양식으로 대접받고 있다. 조폭영화는 이제 이 비극적인 사건 앞에 참회하고 자진해체로 고인의 명복을 빌어야 하는 것일까. 조폭영화가 없으면 이제 한국영화의 상업적 미래는 없는 것일까.이에 대한 내 대답은 간단하다.

조폭영화는 그저 조폭영화일뿐이다. 조폭영화는 급우살해 사건의 현실과 일치될 수 없으며, 한국영화의 상업성의 본질로 치환될 수도 없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허구적 상상물일 뿐이며, 지배적 경향일 뿐이다. 만일 급우 살해사건의 직접적이고도 분명한 원인이 영화 <친구>에 있었다면, 이 영화를 본 8백만명의 사람들은 모두 공범이며 잠재적 살인자들일 것이다. 만일 조폭영화만이 한국영화시장을 먹여살릴 수 있다면 차라리 이 땅의 조폭들이 영화시장을 접수해서 아예 조폭의 생생한 세계를 독립 다큐멘터리화시키는 게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영화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과 특정한 관계를 맺듯이 영화의 폭력성 그 자체는 급우살인이라는 현실과 특수한 관계를 가진다.

그 관계에는 교육적, 가족적, 계급적 맥락들이 개입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조폭영화는 한국영화시장의 정체성이 아니라 하나의 지배적 경향에 불과하다. 조폭영화는 전적으로 시장의 공급수요의 그래프 원칙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며, 대중들의 기호에 맞는 조폭적 소재들이 한국영화시장을 일정하게 경향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허구적 표현물과 실재의 사건 사이의 경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문화적, 사회적 맥락의 독해이며, 특정한 유행형식들이 경향적으로 지배하게 만드는 시장 자체의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이다.  내가 보기에 조폭영화 자체가 더 폭력적이거나 더 상업적인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조폭영화보다 더 조폭적이고 청소년에게 유해한 반교육적 볼거리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는가. 그대는 TTL의 상업성에 왜 분노하지 않는가.

영화의 수사학과 실재성의 차이는 폭력적 표현의 정도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상업성의 구조는 지배적 경향의 차이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더 폭력적인 것을 견뎌낼 수 있는 감성적 힘을 길러내고, 단순반복적 상업적 경향이 다른 상업적 경향으로 빨리 교체될 수 있는 취향의 다각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오늘도 조폭영화 하나 즐겁게 때리면서 내일은 무슨 영화를 볼까만 걱정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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