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호 [사회비평] 영웅의 탄생과 권력의 인격화
2003-04-04 13:37 | VIEW : 17
 
104호 [사회비평] 영웅의 탄생과 권력의 인격화

패배와 승리의 미학, 김대중 신화를 넘어서

최영진 강사 / 중앙대 정치학


서사(敍事)의 시대는 끝났다. 루카치가 말했듯이 영웅이 세상을 인도하고 시대의 광명으로 존재하던 시대는 지났다. 용맹무쌍한 영웅이 사악한 마귀를 처단하고, 그들의 이야기로 신화를 만들어내던 시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령 영웅은 사라졌는가? 아니, 정령, 우리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을만큼 ‘성숙’하였는가?
영웅의 시대에서 영웅은 그 자체로서 완결적이다. 그는 지배할 권리와 복종받을 권리를 운명적으로 함축하고 있으며, 어두운 신화의 시대를 헤쳐나갈 리더로 존재한다. 영웅시대의 백성들은 그에게 귀의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영웅과의 일체화를 통해 자신 앞에 던져진 불확실함을 극복할 명료함을 얻게 된다. 신화와 미신이 난무하던 시대, 뭔가 길을 열어줄 영웅의 탄생은 어디서나 필요한 존재였다.`영웅을 갖지 못한 민족은 희망을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였고, 신화의 탄생은 영웅에 대한 그리움으로 서사시대 우리의 삶을 지배했다.
영웅이 신화의 시대에 존재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숭배는 당연한 것이다. 신화의 시대, 영웅은 한 사람의 고유한 개인임과 동시에 하나의 보편적 의지로 간주된다. 불가능의 영역을 넘어서는 그 의지와 행동은, 그로 하여금 세속의 도덕과 윤리를 넘어서게 한다. 영웅은 세상의 전망을 밝혀주는 일종의 ‘절대정신’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비열한 정략이나 무능의 폐덕마저 역사발전을 위한 ‘이성의 간계’로 보이게 된다. 이러한 영웅이 현실권력의 담지자가 될 때, 권력은 인격화하고 정치는 신화화한다. 권력은 군왕의 부속물로 인격화하고, 권력행위에 대한 반발은 군왕의 신성성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추종자들은 영웅의 권력을 어느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권위와 힘의 사원으로 만든다. 때문에 권력의 중심에 선 영웅은 어떤 외풍에도 영향받지 않는 비판의 무풍지대에 혼연히 존재한다. 권력은 박제되고, 생명력을 잃게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현실로 돌아오자. 적어도 우리에게 섬김의 지극한 대상으로 어떤 군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현실은 여전히 영웅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군왕은 사라졌지만, 현대 한국사에 있어, 박정희와 김일성은 또다른 영웅으로 존재했다. 그들은 권력을 인격화시켰고, 자신들의 의지를 국가정신으로 간주했다. 북에는 권력세습이라는 권력인격화의 궁극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남에서는 공화국의 대통령이라기 보다 어느 ‘제왕의 일갗라고 해야 할 정치권력이 존재했다. 그리고, 어느 한 껸에서는 ‘박정희 영웅론’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우리는 다시 영웅을 필요하다고. 이 난세를 헤쳐나갈 ‘국민의 영웅’이 필요하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런 점에 있어 우리 사회는 적어도 영웅의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김현철 비리사건은 우리 사회에 어떻게 영웅숭배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버지가 군주라면, 그 아들도 그에 상응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권력의 인격화, 권력의 세습화가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있다는 징후로 읽어야 한다. 영웅의 시대, 권력은 그렇게 인격화된다. 법리 보다 김심(金心)이 중요하게 인식될 때, 그 사회는 영웅숭배의 반(反)역사를 범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 역시 그리 자유로와 보이지 않는다. 그의 권력기반도 기본적으로 영웅의 신화에 토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신화는 패배의 미학에 기반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그의 신화는, 세상 어디에도 기댈만한 것이 없었던 민중들이 자신들의 고단한 삶 속에서 정치적 희망을 키워가는 것이었다. 정치적 희망은 늘상 그렇듯이 변혁에의 욕망이요, 신화의 형식과 내용으로 내면화한다. 그래서 신화 속에는 늘상 영웅이 존재한다. 현실과 비현실이 중첩되어 현현하는 절망의 끝머리에서, 영웅의 신화는 탄생한다. ‘은마는 오지 않’을 지 모르지만, 은마에의 그리움은 영웅의 신화로 존재한다. ‘패배의 미학’이 유독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영웅에의 그리움은 돌아오지 않는 은마를 기다리는 이들의 한(恨)이 그만큼 짙기 때문이다.


김대중을 따르는 많은 지지자들에게 김대중 대통령은 하나의 영웅으로 존재했고, 패배의 숙명으로 인해, 더욱 애닯은 그리움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 수난의 동반자로서, 지역차별의 구체적 체험의 구현으로 서로를 버팅기고 있다. 그러나 현실정치에서 영웅은 더 이상 신화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신화의 영웅이 현실정치로 들어가는 순간, 권력의 화신으로 변한다. 권력은 그 자체로 부패하기 마련이고, 역사는 신화를 거부한다. 권력이 영웅화되고 인격화되는 것은 그 자체의 불합리와 비효율성으로 퇴행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김대중은 영웅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신화를 걷어내고, 현실의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그의 자리를 비판과 견제의 무풍지대로 만들어지 말고, ‘대중의 자리’로 내려앉게 해야 한다. 자신을 믿기보다, 권력의 인격화를 거부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또다시 김심의 논리가 정치를 지배할 때, 그것은 곧 권력의 인격화를 의미할 뿐이다.
여기서 문제는 다시 우리다. 특히 김대중 정권 탄생의 주역인 그의 지지자들이다. 김대중은 우리의 영웅일 수는 있지만, 우리는 영웅을 통해 우리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현실에서 우리의 영웅은 일그러진 모습을 보이게 될 지도 모른다. 일체의 신화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 소중한 만큼, 김대중 신화에서도 깨어나야 한다. 그를 신화 속에 남겨두는 것은, 그의 정치력을 약화시킬 뿐이다. 어느 정치학자의 말처럼, 이번 정권의 실패는 정권적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주주의의 실패로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신화의 패절 - 영웅의 세속화은 더욱 중요한 테제인 것이다.
고야의 그림은 항시 상징적이다. 이성이 잠들면 짐승이 설치게 된다. 짐승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불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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