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호 [시사포커스] IMF시대와 용감한 시민상
2003-04-04 13:39 | VIEW : 23
 
106호 [시사포커스] IMF시대와 용감한 시민상

천사의 나발소리인가 악령의 부활인가

호한용 / 편집위원


지난 2월 새마을금고에 흉기로 무장한 은행강도를 은행 여직원이 붙잡아 화제가 된데 이어 각종 범죄행위를 시민들이 검거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3월 중에 일어났던 사례만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몇가지 사례를 꼼꼼히 살펴보면 그 양상이 매우 각양각색이라서 흥미롭다. 주목할 만한 사례를 보면. 3월 6일 20대 가정주부 2명이 흉기를 든 강도를 붙잡은 일이 있었다. 5일 동사무소 직원을 사칭해 가정집에 들어가 혼자 집을 지키던 주부를 위협, 금품을 빼앗으려던 정환섭(26·무직·서울 강동구 천호3동)씨가 5백여m가량 도주하던 과정에서 다른 시민들은 대부분 피했으나 시장을 지나가던 박모(35·여)씨가 용감하게 정씨의 목을 뒤에서 잡아 넘어뜨리는 바람에 뒤 따라온 경찰에 체포됐다. 그리고 3월 17일 20대 시민이 소매치기범을 1백m가량 추격 끝에 잡아내는가 하면, 3월 19일 길가던 시민 2명이 20대 여성을 폭행하며 금품을 빼앗으려던 노상강도를 격투 끝에 붙잡기도 하였다.

시민들이 소매치기범·노상강도를 붙잡는 사건에 이어 택시 등 차량 탈취범을 시민들이 검거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3월 22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장항동 자유로에서 택시 탈취범을 시민들이 붙잡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날 대구시에서는 대구은행 두산동지점 맞은편에 주차된 레간자승용차를 빼앗아 달아나던 탈취범을 영업용택시를 타고 10km 추격 끝에 붙잡는 일도 있었다. 또한 최근 4월 4일에는 행락객 등 11명을 태우고 연육교를 건너다 바다에 빠진 승합차에서 6명의 승객을 구해낸 사례도 있었다. 더구나 바다에 빠진 승합차에서 6명을 구해낸 최인태씨(45·인천국제공항 건설인부·인천시 서구 가좌동)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이와같은 사건들이 이제는 생소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구조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여느 때의 풍경과는 다르게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용감한 시민에 대한 보도가 속속들이 제기되고 있다. 마치 육해공군 상륙작전를 방불케 할 정도로 용감한 시민 찾기의 붐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붐에 정부는 근심섞인 목소리로 시민들에게 용감한 행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고 있을 정도이다. 또한 아예 한국산업안전공단 산하 안전문화추진본부는 '시민안전 신고센터'를 열고 안전과 관련한 시민들의 신고전화를 받고 있다.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과 공동으로 운영할 이 센터는 서울 2곳을 비롯해 전국 18곳의 안전공단 지역본부 등 모두 19곳에 개설되어 있다고 한다.

용감한 시민상이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메세지는 매우 흥미롭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인간이란 매우 이기적이다. 본질적인 인간의 욕정적인 특성을 다스리기 위해 출현한 것이 정치이며, 그간의 역사 속에서 정치의 운영은 로고스에 의한 파토스의 지배로 일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되었든 인류의 역사는 반쪽짜리 인간의 역사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역사의 계보선 상에 있는 근대적인 인간이 '시민'이다. '시민정신'은 마치 절대정신과 같이 인간의 반쪽과 인류사의 반쪽을 격리된 바깥의 영역으로 재단하는 주어져 있는 잣대와 같지 않았는가.

물론 용감한 시민들의 행적은 한편으로 찬사를 보낼만 하다. 근원적으로 악을 보유하고 있는 인간이 스스로 악을 지배할 수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민주주의와 악의 함수관계는 대칭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은 인간생활은 민주주의와 악의 2차원적 공간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악 그리고 사회라는 3차원적 공간 속에서 영위된다는 사실이다. 용감한 시민이 존재하는 이면에는 자본의 신용판결에 평가절하된 낙오자들이 존재한다. 곱상한 넥타이를 매고 모나지 않게 생활을 영위하던 그들에게 악의 부활을 조장한 원인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