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호 [사회비평] 제2기 지자제선거와 합리성
2003-04-04 13:55 | VIEW : 10
 
111호 [사회비평] 제2기 지자제선거와 합리성
“나는 계산한다. 고로 나는 투표한다”

이성로 / 정치학 강사


6월 4일 실시된 4개 지방선거에서 국민회의와 자민련 등 여당이 수도권 3개 지역을 석권하고 호남·충청·제주 등 10곳의 광역단체장을 차지한 반면, 한나라당은 영남권과 강원 등 6곳에서 승리하였다. 이같은 선거결과는 동서분할형태의 지역분할 구도, 낮은 투표율, 이 두가지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최종투표율은 95년 지방선거 당시의 68.4%보다 15.8% 낮은 52.6%로, 전국 규모의 선거 중 60년 12월의 시도지사 선거의 38.8%를 제외하고 역대최저를 기록했다. 특히 서울과 수도권·대도시 지역유권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서울(46.9%), 부산(46.7%), 대구(46.7%), 인천(43.2%), 광주(45.1%), 대전(44.4%) 등 5대 광역시의 투표율이 40%대를 기록했다.


지상명령, 지역주의 궤도 이탈

먼저 지역분할구도에 대해 살펴보자. 이번 선거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지역감정과 함께 정당일체감(party idenification) 혹은 정당태도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정당간의 빈번한 이합집산과 잦은 명칭변경으로 유권자가 미국과 같이 특정정당을 대상으로 장기적이고 내면화된 정당일체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정당일체감은, 비록 그것이 특정정치인에 대한 인물일체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투표행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 즉 유권자의 선택은 “단지 후보개인에 대한 지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후보를 공천하고 권력창출을 위해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정당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표를 던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전통적 친여성향지역인 강원도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강원도는 영남·호남처럼 지역정서를 양분하는 지역도 아니고 충청도처럼 국민회의·자민련의 공동정권의 한축도 아니다. 그런 강원도가 야당인 한나라당 후보를 당선시켰다는 것은, 비록 여권후보인 자민련의 한호선 후보의 자질과 경력에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보여지기는 하나, 강원도민이 한나라당과 계속해서 일체감을 갖는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미시간 학파에 따르면, 정당일체감과 같은 정당성향은 매우 지속적인 정서로써 단기적으로도 후보·이슈 및 정당이 수행한 성과에 대한 긍정적·부정적 평가에 영향을 준다. 미시간 학파는 정당성향이 유권자의 인식과정에서 개개인의 지지나 반대성향에 부합되거나 일치되는 것에 초점을 두게 한다고 본다. 즉 정당성향은 과거의 정치적·사회적 경험을 걸러내는 역할을 하며, 이후의 정치적 대상에 대하여 비교적 안정적이고 예상되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많은 선거분석가들은 절반을 간신히 넘은 52.6%의 투표율은 경제난 속에 허덕이는 민심을 읽지 못한 채 흑색선전·비방위주의 네거티브 선거운동(negative campaign)을 벌인 정치권에 고개를 돌린 민심의 반영이라고 보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중앙선관위)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선거에 무관심하다는 응답자 중 27.4%가 “정치보다 경제상황에 관심이 있다”고 대답하였고, 27.1%가 “누가 당선되어도 상관없다”, 19.1%가 “선택할 만한 후보가 없다”, 5.7%가 “선거결과가 이미 예상된다”고 대답하였다.

또한 전국적으로 3천8백18회가 열린 합동연석회의 평균 청중수는 4백45명으로, 95년의 5백72명에 비해 22%가량 줄었다. 그리고 7백29회의 연석회는 청중이 모이지 않아 취소되었다. 더구나 새로 통과된 선거법은, 물론 이에 의해 금품살포나 향응제공·선심관광과 같은 후진국형 매표(買票) 사례가 거의 사라졌지만, 후보자의 선거득표활동을 엄격하게 제한함으로써 선거열기를 냉각시켰다.

그러나 객관적인 통계치의 의미를 판가름해 봤을 때, 이제 한국선거도 미국·유럽과 같은 정치선진국으로 접어드는 것은 아닌가 한다. 지난 97년 대선은 공화국 역사상 첫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룩함으로써 지역패권 경쟁에서 커다란 획을 그었다. 권력헤게모니를 지키려는 영남권과 단 한번만이라도 차지해 보려는 호남권의 경쟁에서 사상최초로 호남권이 승리함으로써 ‘3김정캄를 청산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 역시 유사한 의미부여를 할 수 있다. 그것은 ‘경제적 투표’ 이론으로 유권자들의 투표행태를 살펴보면 분명하다. 우선 ‘경제적 투표(Economic Voting)’란 경제적 사안에 대한 쟁점투표를 일컫는데, ‘공간적 투표 모델(Spatial Voting Models)’에 의하면 쟁점투표는 유권자의 정립된 의견, 제시된 정책대안에 대한 인지, 그리고 쟁점의 중요성(Salience)등의 조건이 선행되어야 일어나게 된다. 유권자는 자신의 입장과 각 정당이 제시하는 정책과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정당에 투표하게 된다. 즉 개인적 손실함수를 사용해서 가장 작은 손실을 가져다주는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유권자에게 간단한 판단을 요구하는 ‘회고적 투표’와 ‘전망적 투표’가 쟁점투표의 보편적 형태로 주목된다. ‘주머니 사정 투표’라고 불리는 ‘회고적 투표 모델’에 따르면, 유권자는 임기가 끝나가는 정부의 정책업무 수행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개인적인 가계형편을 사용하든지 아니면 전반적인 국가경제상황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에 따르면 유권자는 최근에 직접 체험한 개인적 경제사정의 변화에 근거하며 그 변화에 만족하면 집권당이나 그 후보에게 투표하고, 불만스러우면 타당을 지지하여 결과적으로 집권당을 처벌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유권자는 자신이나 집안의 경제사정보다는 전반적인 국가경제상황의 변화에 근거하여 집권당에 대한 포상과 처벌을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유권자는 물갇실업·경제성장 등의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는 정당을 판단하여 그에 따라 투표할 수 있다. 보수정당이 물가문제에, 진보정당이 실업문제에 상대적으로 더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유권자들은 비교적 수월하게 투표 당시에 중요하게 부각된 문제를 잘 해결하리라고 전망되는 정당에 투표하게 된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개인적 수준의 회고적 평가는 투표행태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고 오히려 국가수준의 회고적 평가가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공동체주의적인 국민정서의 독특한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IMF금융위기에 대한 국가의 위기대처능력이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허리띠 졸라매기’라는 약효가 언제까지 먹혀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방선거의 투표결과에 나타난 평가는 부정적이다. 50%에 육박하는 부동층, 50%대의 낮은 투표율, 무소속층의 약진 경향은 이를 증명한다.




네러티브 對 네러티브의 응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의 약진을 초래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회고적 평가의 대상이 김영삼 정권의 실정이기 때문이다. 왜 김대중 대통령을 ‘준비된 대통령’이라 이야기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 처방의 효력이 약해진 것만은 틀림없다. 또한 무엇보다 크게 작용한 것은 전망적 평가의 독립적인 영향인 것으로 보여진다. 지난 ’97년 대선에서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보여지는 ‘현실적 대안창출’의 문제는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중요한 변수이다. 아직 정권초기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기대감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의 중요한 평가지점은 투표행태에 있어서 네러티브 선거운동에 못지않는 네러티브 투표행태였다는 점이다. 물론 네러티브 투표행태를 합리적 투표행태로 곧바도 등치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합리적 투표행태로 이행하는 1차관문(?)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생활수준이나 교육수준에서 합리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수도권·대도시 지역의 투표율이 40%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와같은 일탈현상이 곧바로 정치사회의 커다란 영향력으로 작용할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낙후한 시민의식’ 운운하면서 3류정치행태를 합리화하는 목소리에 충격을 가하기에는 충분하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나타날 투표행태는 바로 이 경제적 투표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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