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호 [시사논평] 조선일보, 변화구(口)로 승부수를 던지다
2003-04-04 14:27 | VIEW : 31
 
146호 [시사논평] 조선일보, 변화구(口)로 승부수를 던지다
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남청수 편집위원

신문의 공신력은 무엇보다도 ‘공정성’이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사실상 완벽하게 중립적인 권력균형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할 때 (절대적인) 공정성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언론에게는 현실적으로 비판의 기능을 수행하는 최소한의 사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공정성의 기본은 무엇보다도 논리의 일관성이다.
조선일보의 10월 15일자 사설 ‘고대 앞에서 벌어진 ‘反지성’’은 이런 측면에서 언론기관으로서 논리의 일관성을 갖고 있는지에 의심을 갖게 한다.

그 주에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고려대 총학생회의 김영삼 고대 진입저지 사건’을 다룬 이 사설은, 당시의 사건이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하는 “우리의 아카데미즘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는 특정한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을 무슨 세력이라고 매도하는 이념적 편향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사건에 대한 조선일보의 평가 자체는 논외로 치더라도 이러한 주장에는 앞서의 일관성이 부재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일례로 이 신문의 9월 6일자 사설 ‘‘뒷문’으로 빠져나온 이회창총재’를 보자. 여기서는 이회창 총재의 연세대 강연 때, 그 앞에서 시위를 했던 “한총련 조직원들 수십명”에 대해 “그들은 으레 그래왔기 때문에 전혀 신경쓸 필요도 없고 괘념할 가치도 없다.”, “그런 극단파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있는 법이기 때문엡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면 그만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상식적인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 이 두 사설은 모순된다. 불과 한 달만에 생각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조선일보가 주장하는 “아카데미즘”은 듣긴 듣되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이런 현상은 다른 사설에서도 나타나는데, 10월 17일 사설 ‘잘못된 기소로 ‘억울한 옥살이’ 많다’에서는 “검찰의 과잉수사”로 인해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한 옥살이”를 했으며, 이는 “우리사회 인권의 현주소가 아직도 낮은 수준”에 있음을 반증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9월 3일 사설 ‘‘인권위원회’도 좋지만’에서는 “이들 단체의 주장을 정부가 수용하기 어려움을 뜻한다” 따라서 “인권위원회를 왜 두어야 하는지 원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며, 그보다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한다. 반면 9월 1일 사설 ‘검찰문건의 유출과 언론자유’에선 “검찰은 조직적 특성이 강한 관료집단이다. 그래서 역대 권력은 항상 검찰을 자기편 ‘심복’으로 만들려는 경향을 보여왔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조선일보는 검찰이 권력이라는 정부의 제약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으면서, 인권위원회의 구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정부의 수용”여부와 “검찰의 정치적 중립”확보라는 근거를 대고 있다.

불과 두 달이라는 기간동안 ‘구독률 1위 신문’이 펼친 이런 화려한 말바꾸기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조선일보에게 ‘특별한 의도’가 없다면 대한민국에서 신문을 보는 사람 중 가장 많은 사람의 기억력이 ‘두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일테니 말이다. ‘1등신문’이 생각하는 것이니 이건 심각하게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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