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호 [시사기획] 한국사회에서 폭력이란 무엇인가②폭력 재생산 구조 형성의 역사
2003-04-04 14:30 | VIEW : 34
 
148호 [시사기획] 한국사회에서 폭력이란 무엇인가 -②폭력 재생산 구조 형성의 역사
건국 이후 반세기, 공포의 그늘은 걷히지 않는가

김윤철 / 한국정치연구회 연구원

특정 사회의 폭력성은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그리고 시민사회 내의 지배와 피지배세력 간의 힘의 관계를 규정하는 두 가지 구조적 기제의 ‘교차적’ 작동을 통해 재생산된다. 하나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있어서 국가의 시민사회에 대한 힘의 우위를 담보하는 (비밀)경찰과 군대 그리고 정보기구 등의 물리적 기제, 즉 억압적 국가기구의 작동이다. 다른 하나는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 내 피지배세력의 저항을 억압하고 나아가 이러한 저항이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는 보복에 대한 위협감과 공포감을 조성하는, 더 나아가 국가에 대한 순응을 규범화하고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기제의 작동이다.
이때 그 사회의 폭력성은 단지 국가에 의한 시민사회내 피지배세력에 대한 폭력, 즉 ‘국가폭력’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방관’하고 ‘동조’함으로써 시민사회 자체의 폭력성, 즉 국가폭력의 ‘대리수행’뿐만이 아니라 ‘폭력성의 내면화’에 따른 시민사회 내적 갈등에 대한 폭력적 해결방안의 ‘선호’라는 문제로까지 확장된다.

한국사회의 폭력성의 기원은 무엇보다도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국민국가건설 노선을 둘러싼 좌우대립의 정치-사회적 지형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때 우리는 ‘외삽국갗로서의 미군정의 역할에 주목할 수 있다. 즉 미군정은 좌우대립의 정치-사회적 지형에서 좌파를 배제하고 반소-반공세력인 우파중심으로 국민국가를 주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좌파가 일제 지배 하에서의 민족해방투쟁경력으로부터 획득한 정당성에 기반하여 당시 전국적 수준에서 조직된 인민위원회를 통해 행정 및 치안권을 장악하면서 ‘대항국갗 세력으로서 정국주도권을 갖고 있었던 반면에, 친일행각을 벌여온 우파들은 전혀 그렇지 못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미군정이 좌파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방법은 억압적 국가기구를 통한 강제 혹은 폭력에 의존하는 것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군정은 다른 어떤 정책 과제의 수행보다도 인민위원회로부터 행정·치안권을 인수하기 위해 경찰력을 중심으로 한 억압적 국가기구를 복원시켜내는 데에 착수하였다. 특히 미군정은 경찰조직을 다른 어떤 조직보다도 중앙집권적 체제로 정비하였는데, 이것은 미경찰고문들로부터도 비민주적인 것이라고 비판 받았다. 또한 경찰조직의 이러한 체제정비 과정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일제하 한국인 경찰간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경찰병력으로 일제하 군경력자들이 대거 충원되었다는 점과 일제 시기에 비해 경찰력의 규모가 2배 가까이 증강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미군정 폭력에 의한 국가형성
이러한 경찰력의 인적구성과 규모는 좌파척결 과정이 매우 대규모적인 차원에서 강도높은 폭력의 행사라는 양상을 띠고 전개되게끔 하는 것이었는데, 이들로써는 좌파에 대한 ‘완전한 척결’이야말로 자신들의 친일행각에 대해 책임이 물어지고 처벌이 가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폭력성이 구조적으로 재생산되는 것은 외삽국가인 미군정이 단지 억압적 국가기구를 창출해내었다고 완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폭력성이 재생산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한국사회에서 폭력성이 재생산될 수 있는 충분조건은 바로 시민사회 내에서의 이러한 국가폭력에 대한 ‘침묵의 메커니즘’이 자리잡게 되고, 나아가 폭력성이 하나의 ‘문화’로서 구조화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한국전쟁과 그 이후 이승만 정권을 비롯한 역대 정권, 특히 박정희 정권에서 자행된 독재정치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한국전쟁은 남한의 정권이든 북한의 정권이든 간에 국가폭력의 ‘악마성’이 시민사회 내 성원들에게 육체적으로 각인되게끔 하는 것이었고, 이로부터 시민사회 성원들이 국가폭력에 대한 공포감으로부터 저항에 대한 의지를 스스로 거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국전쟁 이후 부터 60년 4·19 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 대학에서는 물론, 그 어떤 조직이나 사회단체에 의한 저항의 움직임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전쟁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전쟁의 전세 상황에서 시민사회 성원들 간에 자행된 ‘비공식적인 사적보복’이라는 차원의 폭력이다. 즉 전쟁 상황에서 시민사회내 갈등이 화해 불가능한 ‘적과 동지’의 차원으로 극명하게 단락되면서, 폭력성이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시민사회 성원 간의 상호불신이 팽배해지게 되는데, 실제로 한국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 시기 이후 한국사회의 상부상조, 혹은 상호부조의 전통이 파괴되었다고 증언하고 있기도 하다. 결국 한국전쟁의 경험은 한국사회에 있어 국가의 폭력성에 대한 공포와 그에 따른 준자발적 순응을 넘어 그것을 정당화하는 반공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게끔 하는 것이었고, 이른바 ‘레드 컴플렉스’라고 불리우는 시민사회의 극단적 우경화의 결과를 낳게 한다.

공적폭력 내재화가 사적 폭력으로
이러한 경향은 박정희 정권 시기에 들어 더욱더 강화되어지는데, 그것은 이것은 이른바 남한판 ‘속도전’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민중배제적 경제성장 전략에 기반한 개발독재체제로 귀결되어진다. 특히 이 시기는 국가의 폭력성이 시민사회 내에 ‘군사문화’로 일컬어지는 규범적 가치로 내장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군사문화적 가치는 체계화된 학교 교육은 물론 직장 등 모든 시민사회의 일상적 삶의 장을 통해 재생산되었다.

가령 교련교육의 실시를 비롯 예비군 제도의 창설 등이 그것의 극명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의식으로서 폭력적 가치의 내면화, 또 그러한 폭력적 가치를 경제성장이라는 기제로 활용했던 개발독재 체제하에서의 군사문화의 장착 등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사회의 폭력성은 박정희 정권 이후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하의 1980년 5월 광주에서 극에 이르렀다. 결국 한국사회의 폭력성의 재생산 구조 형성은 시민사회에 대한 물리적인 힘의 우위를 통한 억압적 기제들의 마련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주입, 그리고 시민사회 성원들의 극단적인 국가폭력에 대한 육체적 경험으로서의 전쟁, 이에 따른 국가폭력에 대한 준자발적 순응과 시민사회 갈등기제의 해결방해로 극단적인 형태를 보여주었다.

결국,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탄 현재까지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탄압이 시민사회의 방관 하에서 여전히 작동되면서 아직까지도 해소되고 있지 못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