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호 [시사기획] 한국사회에서 폭력이란 무엇인가③권위적 폭력과 저항의 反 폭력
2003-04-04 14:33 | VIEW : 19
 
149호 [시사기획] 한국사회에서 폭력이란 무엇인가③권위적 폭력과 저항의 反 폭력
항상적인 폭력, 긍정적인 사용은 가능한가

최정기 / 전남대 사회학과 강사

‘비폭력’은 어떠한 효과를 발휘하는가.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국가권력 및 사회운동과 폭력의 관계는 상당한 변천사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1980년대에는 국가권력의 폭력이 매우 강하게 발휘되었던 시절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사회운동의 폭력적인 저항도, 학생들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시민들까지 그 정당성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매스컴에서는 끊임없이 비폭력을 선전하였지만, 적어도 광주지역의 경우, 그 효과는 거의 없었다. 반면에 1990년대에는 그러한 상황이 크게 변화하였다. 소위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가권력의 폭력 사용은 여전하였지만, 운동세력이 권력에 저항하여 사용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다양한 비판이 쏟아졌다. 나아가 최근에는 사회운동 진영의 비폭력전술과 그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 그리고 시민사회 수준에서의 폭력에 대한 염증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폭력에 대한 우리 나라 사람들의 태도에는 극단적인 양면성이 존재한다. 한편에서는 비폭력을 선호하며 폭력과 관련한 모든 것들을 증오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다른 것, 혹은 타자성에 대한 증오와 공격성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국가권력의 폭력도 싫고, 사회운동 진영의 폭력시위도 싫다는 사람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그 극단적인 예일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폭력의 내재화는 구조화된 권위적 폭력의 또 다른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발견한다. 폭력에 대한 염증이나 비폭력의 주장은 모두 권위적 폭력, 즉 제도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아닌가하는 점이다. 폭력에 대한 비판이 국가권력이 독점하고 있는 폭력만을 정당화하고, 그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봉쇄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는 모든 인간이 보편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관념에 근거한 사회였다. 그 결과 근대사회는 지배와 관련하여 한 가지 딜레마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자유롭고 이성적인 개개인들의 무질서한 행위와 사회질서의 유지 및 재생산 요구 사이의 딜레마였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한 것이 근대의 철학-법률적 담론에서 제시하는 일반이익(general interest)이며, ‘통제를 내면화한 개인’이었다. 또한 이러한 통제방식을 구체화한 것이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의 독점과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구성된 근대 국가였다.

폭력은 근대사회의 상수
이렇게 볼 때, 전근대사회의 비인간적인 폭력을 딛고 형성되었다는 근대와 근대적인 정치체제는 폭력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폭력의 사용을 제도적으로 조절하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폭력이 없는 사회’는 과연 가능한가? 이 질문에는 비폭력이 최고의 가치라는 함의가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폭력은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상수였다. 비폭력을 강조하는 주장의 근거로 자주 제시되는 간디의 경우에도 폭력은 중요한 상수이다. 영화 간디를 보면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과 비폭력적인 전술을 고수하는 시위대 옆에는 반드시 신문기자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의해 폭력과 비폭력의 극단적인 대비가 사회적으로 고발당한다. 비폭력이라는 주장의 이면에는 미디어매체를 이용한 폭력의 극대화가 자리하고 있다. 극단적인 폭력에 맞서는 비폭력적인 저항, 이러한 대비를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평화로운 질서라는 것 자체가 전쟁과 정복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폭력 없는 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
즉 폭력은 항상적인 사회의 구성원리이다. 다만 그것이 현재화하는 정도와 그 형태가 다양할 뿐이다. ‘폭력이 없는 사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을 국가권력이 독점한 체 그것의 사용을 조절하는 사회가 존재할 뿐이다. 이는 사회운동도 마찬가지이다. 폭력의 사용여부가 전술적인 고려는 될 망정, 전략적인 고려대상인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폭력이 인간 사회의 상수라면, 그것의 긍정성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이것은 다만 국가권력보다는 저항적인 의미의 폭력에 보다 잘 적용되는 곤란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에 하나의 지침을 줄 수 있는 것이 전복적인 탈근대적 담론, 즉 역사-정치적 담론일 것이다. 근대 국가의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철학-법률적 담론이 인간의 보편성에 근거한 주권이론에 근거한다면, 역사-정치적 담론은 사회세력들이나 다양한 특이성들 사이의 영구전쟁에 근거하고 있다. 전자가 근대적인 담론에 의한 것이라면, 후자는 근대를 뿌리부터 전복시킬 가능성이 있는 탈근대적인 접근방식이라 할 수 있다.

대중은 욕망 그 자체이다
이들 전복적인 탈근대적 담론이 갖는 독특함은 대중을 수동적인 주체나 단순한 객체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와 니체를 이어받은 전복적인 탈근대적 담론들은 대중을 능동적이고 생성적인 힘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대중은 욕망을 가진 존재로, 그것도 정형화된 틀이 아니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발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상정된다. 아니 대중은 힘이나 욕망 그 자체가 된다(사람이 존재하고 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힘이나 욕망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의 욕망을 해방시키는 힘(폭력을 포함한)의 사용을 절대적으로 긍정한다.

즉 문제는 폭력을 포함한 힘의 사용이 지향하는 방향이며, 그러한 힘이 지닌 효과일 것이다. 그것이 대중의 욕망을 해방하는 방향으로 사용되는가 아닌가가 문제가 된다. 유럽의 예를 들면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해방구를 건설하기 위한 점거운동은 대중의 욕망을 해방시키는 것이지만, 신나치주의자들의 해방구 점거는 그러한 대중의 욕망을 재영토화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결국 폭력이 행사되는 사회적 맥락과 그 효과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에 따라 폭력은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부정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수준에서 보면 이러한 의미의 폭력 사용은 결국 소수자의 문제로 변형된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근거해서 삶의 조건을 바꾸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때, 그러한 폭력은 대중의 욕망을 해방시키는 방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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