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호 [시사논평] ‘조서방’을 믿느냐 아니면 ‘김서방’을 믿느냐
2003-04-04 14:34 | VIEW : 28
 
149호 [시사논평] ‘조서방’을 믿느냐 아니면 ‘김서방’을 믿느냐
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남청수 편집위원

어떤 사람 A가 글에서 모종의 의견을 제기하던 중, 누군가의 주장, 이를테면 ‘일찍이 공자가 이르기를~’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논리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려 한다. 그리고 듣던 사람 B는 별 이의 없이 그의 의견을 수용한다. 만일 여기서 B가 A에 반론을 제기했다면, 그것은 다음의 경우이다. 하나는, 논의의 맥락에서 A의 ‘공자’해석이 B와 다를 때, 다른 하나는 B가 공자를 모를 때이다. 앞이라면 B는 각자의 해석의 타당성을 갖고 논쟁할 것이지만, 뒤의 경우 A는 ‘공자’가 아닌 B가 아는 다른 예를 제시하지 않으면 논쟁은 진전되지 않는다. 이것은 논쟁에서 기본적인 게임의 규칙이다. 이 규칙은 신문과 독자 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

조선일보의 11월 27일자 사설 ‘시민운동의 재정립을 위하여’는 시민단체협의회 세미나에서 나온 “자성론과 다짐”에 대해 “또 하나의 선정적인 정치운동 단체”로 변해가던 시민단체들이 “자기쇄신의 국면을 맞고 있”으며, “모처럼의 자성론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 사설에서 문제는 도대체 그 시민단체협의회 세미나에서 나온 “자성론과 다짐”의 내용이 뭔지를 밝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근래의 시민운동은 또한 정의의 판관이라는 자의식에 너무 사로잡힌게 아닌가 하는 평판을 들어왔다. ‘우리가 제시한 의로운 기준은 실정법 여하 간에 관철시켜야하고, 그것에 어긋나는 것은 밀어붙여서라도 제거해야 한다’는 식의 이미지를 주어온 것이다”라는 것이 이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이것은 “평판”을 하는 자와 “이미지를 주어온” 주체가 누군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 즉 도대체 그 평판과 이미지가 ‘공자’의 것인지 ‘서울의 김서방’의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 중 소위 말하는 ‘~카더라’체 논법인데, 이런 사례는 너무 많아서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11월 30일자 사설 ‘엉터리 날림 졸속 국회’에서는 한나라당의 등원 이후에도 국회의 업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논지를 전개하는데, 논거로서 의원의 지역 이기심을 비판하면서 “‘우리 여당도 생기는 게 없어서 그러라는 어느 의원의 불참사유 설명의 변은 충격적이다”는 부분이다. 이 문장에선 그 의원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조차 제공되지 않고 있다. 아니 그런 말을 한 ‘어느 의원’이 도대체 어느 의원인지 독자가 알게 뭐냔 말이다. 이걸 논거로 제시한 저의를 모르겠다.

11월 28일자 사설 ‘“국세청장! 재경부장관!”’은 더 놀랍다. 여기서는 “27일자 일부 신문에 실린 “국세청장! 재경부장관! 기업인을 괴롭히지 말라!”는 광고에 대해 “한 중소기업인의 견해가 다소 과격하긴 해도 개혁을 외쳐온 현정권의 실상”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그가 광고에서 주장한 대로 납세의무를 성실히 했는데도 국세청이 부당한 세금징수를 했는지는 행정심판 등을 통해 가릴 문제”라고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것이다.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이 사설은 그 광고주의 피해여부를 빼면 오로지 조선일보의 입장만이 남을 뿐이다.
법이 법으로서 힘을 갖는 것은 그것이 갖는 ‘권위’ 때문이다. 하지만, 그 권위마저 없다면 ‘권위에의 오류’는 애시당초 말도되지 않는 일이다. 조선일보와의 논쟁에는 게임의 규칙이 있는가. 여기서 이런 말이 문득 떠오른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조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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