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호 [편집위원의 세상보기] “소극적 안락사 허용해야”
2003-04-04 14:41 | VIEW : 25
 
154호 [편집위원의 세상보기] “소극적 안락사 허용해야”

채형신 편집위원


지난달 10일 네덜란드 상원이 안락사를 승인함으로써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로 이를 합법화한 국가가 됐으며, 전세계적으로 이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고 있는 추세다.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시도는 이미 미국과 호주에서 이루어졌다. 96년 호주의 노던테리토리는 자살방조법을 통과시켜 안락사를 인정하였으나, 6개월만에 연방상원에 의해 폐기되었다. 미국에서는 오리건주가 1994년 11월 존엄사법을 제정한 후, 안락사에 대한 위헌여부가 논란이 되다가 1997년 10월 연방 대법원에 의해 비로소 합헌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벨기에와 대만도 곧 안락사를 합법화할 것으로 보이며, 콜럼비아, 스위스 등에서는 안락사를 묵인하고 있다. 안락사 찬성론자들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에서 죽음을 맞기보다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국가가 법으로 제한할 수는 없다는 주장을 편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무분별한 안락사가 행해질 위험을 우려하면서 국가의 생명보호권은 개인의 죽음 선택의 자유보다 우선한다고 맞서고 있다. 이와 더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안락사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번에 네덜란드에서 합법화된 것처럼 말기암환자 등 회복불가능 환자에 대해 독극물이나 가스 투여 등으로 사망케 하는 행위를 적극적 안락사라고 한다면, 환자에게 제공되던 의료적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소극적 안락사라고 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소극적 안락사는 환자의 고통과 의료 비용부담을 줄이기 위해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의사는 환자의 생명 연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강해, 현행 형법은 소극적 안락사 마저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98년 5월 15일 서울지법 남부지원은 의식이 없는 환자를 부인의 요구에 따라 퇴원시켜 사망케 한 혐의로 서울 보라매 병원 전문의 ㅇ모씨에 대해 살인죄를 적용, 징역 2년6월을 선고하는 등 법적으로 소극적 안락사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한 태도를 취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76%가 안락사에 찬성하는 등 사회적 분위기가 이전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비록 안락사 문제가 인간의 생명과 존엄에 관한 문제라는 점에서 다수결의 원칙 따위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국민적 합의를 통해 법적 허용을 검토할 때가 되었다.뇌사상태 환자의 수명을 지속하는 데는 수백만원의 비용이 소요되고, 말기암 환자나 불치병환자의 경우 그 비용은 더욱 증가한다.
이는 환자 가족에게는 막대한 경제적,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하여, 가족간의 불화와 경제적 파탄을 유발하기도 한다. 고려시대 수명이 다해가는 노인을 구덩이에 버렸다가 죽으면 묻었다는 고려장은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혹은 기계에 의존하여 생명을 보존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또한 절대 바람직할 수 없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생명유지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사망의 시기’를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나 사회에 경제적,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하는 ‘사망의 과정’을 과도하게 늘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법개정을 통해 환자의 인격권을 보장하고, 그가족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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